독립기념관, 충청출신 123명 포함 '숨은 영웅' 2830명 발굴. 일제강점기 신문·판결문 등 흩어져 있던 자료분석으로 결실. 추가 확인 거쳐 국가보훈부 유공자 예우절차 밟는다.
조국이 일제강점기의 터널을 벗어난 지 79년. 광복 이후 반 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자손 상당수는 배움의 길에서 멀어졌고 가난 때문에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형편이다. 조상이나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는 없다. 몇몇 자손들은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자 동분서주하지만 이미 많은 자료들이 사라져 선조의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최근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2830명을 발굴한 건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여기엔 그간 독립운동사에서 가려진 채 잠들어 있던 약 123명의 충청의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돼 있다.
◆ 충청의 독립운동가 세상 밖으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가 최근 그동안 숨겨져 있던 독립운동가 2830명 발굴에 성공했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는 국내외에 흩어져있던 각종 자료를 조사해 3·1운동 1315명, 국내 항일 394명, 학생운동 339명, 임시정부 70명, 의열 투쟁 3명, 만주 방면 333명, 일본 방면 80명, 중국 방면 35명, 노령 방면 23명, 외국인 232명 등 2830명에 달하는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찾아냈다. 이 중엔 추정치이긴 하나 본적은 충청도이지만 나고 자라 독립운동을 했던 지역은 다른 곳인 경우를 포함해 약 123명이 충청 출신인 것으로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3·1운동(80명), 국내 항일(13명), 학생운동 (8명), 임시정부(3명), 만주 방면(6명), 일본 방면(1명), 중국 방면(1명), 노령 방면(1명) 등이다.
◆ 고향 땅에서 “대한독립만세” : 이상설(李商雪)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가 찾아낸 충청 출신 독립운동가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은 고향 땅에서 조국 해방을 꿈꾼 이상설이다. 1894년 충북 영동 심천 초강을 본적으로 둔 그는 1920년 독립군의 자금을 모집하고자 충남 지역에서 조직된 대한건국단에 가입해 금산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흔적이 밝혀졌다. 매일신보 1922년 7월 6일 자 ‘군무독판(軍務督辦)과 연락(連絡)하여 조선 안에서 모사를 계획하다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상설은 김좌진과 밀접한 연락을 맺은 후 육혈포를 소지한 채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의 발굴 조사에서 이상설은 강도상인(强盜傷人) 및 총포화약류취제령(銃砲火藥類取締令) 위반, 증거인멸죄(證據湮滅罪)로 일제에 붙잡혀 징역 3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충청의 독립정신, 조선팔도로 : 신주(申周)
조국을 위한 전장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를 누볐다. 1920년 태어나 충남 홍성 광천 신진을 주소로 둔 독립운동가 신주가 그 주인공이다. 신주는 1941년 서울에서 비밀결사 조선독립단을 결성해 활동하고 1944년 1월부터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일본 패전기에 재외 독립단과 호응, 일제에 봉기하고 혁명의식을 북돋는 일에 전력할 것을 결의하며 조국 독립을 외쳤던 투사다. 제국석면광업주식회사 광천광업소 좌관 조수이기도 했던 그는 조선의 행복을 위해선 일본의 속박으로부터 이탈해 독립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확신했던 충청의 독립운동가였다. 혁명 투쟁을 통한 독립을 꿈꿨던 신주는 해방을 불과 보름여 앞둔 1945년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의 형을 받았다.
◆ 적진 한복판에서 독립을 꿈꾼 충청인 : 이우진(李愚震)
충청의 독립운동가 이우진은 적의 심장부 일본 동경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다. 1906년 태어난 이우진의 본적은 충북 제천 모산으로 부유한 농가 출생이다. 그는 1925년 의학에 뜻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에 종사하면서 노동자 농민의 자각으로 조선의 독립이 달성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 이후 이우진은 동경무산청년동맹 및 동경조선노동조합에 가담했고 1928년엔 재일본노동총동맹 동경조선노조 상임위원 교육출판부장으로 선임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1930년 발행된 중외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심천지구 구성원으로 대중시위와 잡지 발행, 격문 발송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1932년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독립운동 자료는 종류가 다양하고 일본어·러시아어 등으로 쓰인 문서가 많아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독립운동 활동 사실의 객관적 입증을 위해 자료의 교차 검증도 필수적이라 독립운동 전문가의 조사와 분석이 필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는 새롭게 찾아낸 독립운동가 2830명에 대한 추가 확인 등을 거쳐 관련 자료를 국가보훈부로 넘겨 유공자 인정 절차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들이 유공자로 인정될 경우 시기에 맞춰 포상 및 예우가 이뤄지게 된다. 김은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 팀장은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아 포상을 받지 못하면 사실 우리가 기억하거나 추모하기란 힘든 게 현실”이라며 “잊힌 독립운동가 발굴을 통해 이 분들이 공식적으로 공적을 인정받는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