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을중의 을’ 경비근로자의 오늘

2024. 05. 07 by 김지현 기자

경비근로자도 관리소장도 입주민 앞에선 ‘을’
갑질방지법 시행 2년 됐지만 구조적 문제 여
대전시 공동주택 관리규약, 대덕구 조례 제정 
전문가들 “법 개정과 인식개선 맞물려야”

#1. 얼마 전 A 씨는 다니던 아파트를 그만뒀다. 3.3㎡도 안되는 비좁은 휴게시설로 버티지 못해서다. 밤샘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데 잘 곳도, 발 디딜 틈도 없어 침낭을 깔고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해야 했고, 간신히 잠이 들면 급작스러운 민원 전화가 걸려와 A 씨를 깨웠다.

#2. 아파트 경비근로자 B 씨는 지난 2022년 ‘을중의 을’이라는 경비근로자의 현실을 직접 겪었다. 당시 자신과 교대근무를 하는 동료가 3개월 가량 병가를 쓴 후 복귀했지만 일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B 씨가 모든 업무를 도맡아 했다. 결국 B 씨의 동료는 그만두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아파트 동대표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이는 번복됐다.

아파트 경비근로자가 오늘도 을의 위치에서 고달픈 하루를 견디고 있다. 암묵·관행적으로 지속되는 쪼개기식 초단기 계약으로 인해 불합리한 상황을 겪어도 입주민과 관리소장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갑(甲)질’을 견디지 못한 경비근로자의 사례가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자 우리사회는 그제야 관련 법안을 속속 내놓고 있다. 최근 대전 지역에서도 경비노동자 고용안정 촉진을 위한 준칙이 개정됐다. 또 대덕구 주민 발안 경비조례도 지난해부터 시행 중이다. 경비근로자 고용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을 뗐다는 점에서 상당히 큰 의미가 있지만 갈 길은 멀다.

경비근로자를 향한 갑질은 아파트라는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적 요인에서 기인한다. 아파트의 경우 입주자대표회의, 위탁관리회사, 경비용역회사 등 3가지 형태로 경비근로자를 고용한다. 아파트 경비노동자 고용안정을 위한 조사연구 및 노사관계 지원사업 공동사업단이 2019년 전국 15개 지역 경비근로자 총 3388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전국 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경비노동자 고용 방식은 전체적으로 입주자대표회의 직고용 9.4%, 위탁관리회사 25.4%, 경비용역회사 65.2%다. 이 중 대전은 입주자대표회의 직고용 12.1%로 전국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공공운수노조 대전지역일반지부 경비관리지회 현태봉 사무장은 “아파트는 입주자대표, 관리소장, 시설관리근로자, 미화·경비근로자가 있다. 이 가운데 경비용역업체도 있고, 동대표도 있다. 여기에 더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룹인 입주자 개개인이 있다. 계층적 구조 속에서 관리소장이 민원을 총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이 빚어지면서 고스란히 경비근로자에게로 향한다”라며 “힘든 부분에 대해 경비근로자들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계층적 구조상 가장 아래에 있으니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어려움에 경비근로자 처우개선을 위한 나름의 움직임은 있었다. 대전시는 최근 공동주택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했다. 아파트와 용역업체의 계약기간, 경비노동자 계약기간을 동일하게 하거나 1년 이상의 기간으로 체결하도록 촉진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강제적인 건 아니지만 그간 병폐가 된 아파트 경비근로자 3개월 초단기 계약을 근절하기 위한 기틀이 마련됐음은 분명하다.

이와 더불어 지역 최초로 2022년 통과된 대덕구 주민 발안 경비조례도 지난해부터 현장 적용되고 있다. 대덕구 주민 발안 경비조례는 고용 불안, 노동환경 개선 등에 대한 내용을 추가·보완한 것으로 공동주택 노동자의 인권 증진 및 고용안정에 필요한 사항을 담았다. 이처럼 나름의 방안이 마련됐지만 현장 안착을 위해서는 법적 정비와 함께 인식개선이 도모돼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계층적 요인과 불안정한 고용 관계가 가장 큰 원인이자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 사무장은 “법적인 체계로 보면 국토교통부의 공동주택관리법이 있고, 그 아래 시·도 준칙, 아파트 규약이 있다. 공동주택관리법에는 부당지시를 하지 말고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수준의 내용만 담겨있다”라며 “현장 안착을 위해서는 법적 개선과 맞물려 입주민의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현장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소수의 아주 좋은 사람,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악성 입주민, 그리고 대다수의 무관심한 사람으로 입주민을 나눈다. 결국 좋은 사람 일부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