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전쟁과 문학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이번 호에서는 388년전 63세의 사대부가 할머니가 3년 9개월간 병자호란의 피란살이를 포함하여 당시 힘들었던 자신의 일상생활을 꼼꼼하게 기록한 ‘병자일기’를 산책하고자 한다.
◆ 남이웅·조애중 부부와 ‘병자일기’
‘병자일기’는 조선 인조 때에 좌의정을 지낸 남이웅의 아내 정경부인 남평조씨가 1636년(병자) 12월 15일부터 병자호란을 당해 황급히 피란길에 오르기 시작하여, 이후 서울 집으로 돌아와 정착하며 생활하는 1640년(경진) 8월 9일까지 약 3년 9개월을 한글로 필사한 일기이다. 원본 표지에는 ‘숭정병자일기(崇禎丙子日記)’라고 되어 있지만 숭정은 명나라 연호이므로 통칭 ‘병자일기’라 한다. 또 ‘병자일기’의 저자는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 없이 ‘남평조씨’라 했는데, 남산영당의 신주 뒷면에서 조애중(曺愛重)이라는 이름이 밝혀져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조애중의 ‘병자일기’는 작품의 시간적 순서와 내용에 따라 난중피란기, 여산체류기, 충주체류기, 서울귀환기로 4분 된다.
① 물이 없는 무인도라. 대나무 수풀에 가서 눈을 긁어모아 녹여서 먹었다. (중략) 우리 일행은 거룻배도 없고 그릇도 없으니 한 그릇의 물도 얻어먹지를 못하고, 밤낮으로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싶을 뿐이었다. (1637년 1월 17일)
② 동생님네 계신 곳이 연하여 있고 조카님네들이나 매일 같은 곳에서 지내니 불행 중 다행하며 의주댁 형님도 한 마을에 계시니 마음 든든하다. (1637년 4월 19일)
③ 종들을 풀어서 축이에게는 청풍과 충주의 곡식을 모으러 다녀오라고 하고, 충이는 춘천에 다녀오라고 했다. (1637년 9월 17일)
④ 어려서 죽은 아이들은 생각도 아니 한다고 하겠지만 두 아들은 13년씩 25년씩 나를 빌려 모자되어 살뜰히 사랑하며 살다가 다 죽어지니 알지 못할 일이로다. 무슨 죄 때문에 나를 이렇게 간장을 태우게 하시는가? 어느 날, 어느 시에나 마음이 누그러져 풀릴까? (1638년 4월 5일)
⑤ 가까스로 배에서 내려 신주를 모시고 집에 들어왔다. 영감을 뵈옵고, 일가 모든 분이 기운들이나 그만하여 계시니 온 집안에 이런 경사가 없으나, (중략) 반갑고도 설운 정을 어디다 비교하리. (1638년 6월 2일)
①은 병자호란 당시 고위 관리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있던 남편 남이웅으로부터 전쟁이 발발했으니 "짐붙이는 생각지도 말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청풍으로 가시오."라는 급보를 받고서 충북 청풍으로 허겁지겁 피란길에 올라 물도 못 마시고 굶주리며 통곡만 하는 비참하고 험난한 난중피란기의 시작을 알린다.
②는 전쟁통에도 친척들의 배려 속에 여산 등지에 머물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정을 나누는 모습이다. “우리 노비들도 상전님 덕분에 하나도 죽은 사람 없이 다 살았노라고 하면서 모두들 즐거워하더라고 한다.”(1637년 11월 10일)는 기록과 일맥 통한다. 신분제도가 붕괴할 무렵에도 상전을 칭찬하며 기쁘게 따르는 일이나 친척끼리 우애가 돈독한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③은 조애중이 여장부로서 피란생활 중에도 종들을 데리고 직접 농사를 짓고 나름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토를 관리하며 공(貢)을 받아오게 하는 등 농업경영을 한 것이다. ②와 ③은 여산체류기로 평소 식솔의 상하 고하를 크게 차별하지 않은 조애중의 넉넉하고 따뜻한 성품과 적극적이고 원만한 관계 맺음을 보여준다.
④는 주변의 일상생활 이야기를 주로 쓴 충주체류기로서 여기서는 13세와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먼저 떠난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가슴 속에 묻은 한을 얘기한다. 그들의 생일제와 기제 때가 되면 언제나 담대했던 저자마저 가슴 속이 무너져내리고 슬픔의 감정은 끝이 없었다. 일기를 분석해 보면 전쟁 중에서도 기제와 생신제가 연 30건 이상이고,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라던 그 시절에 친정 부모에게 친손이 있었음에도 윤회봉사와 외손봉사를 한 점이 눈길을 끈다.
⑤는 무사히 귀국한 남편이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날, 식솔들과 함께 '신줏단지'를 모시고 남편을 만나 반갑고도 서러운 복합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남편이 무사히 돌아온 이후 찾아오는 문객들이 워낙 많아져 일기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주위가 어수선’하고, 음주가 많아 수시로 아파서 몸져눕는 등 일상으로 돌아온 서울귀환기이다. 이후 일기는 "맑고 바람이 불었다."(1640년 8월 9일)는 짧은 글로 긴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 남산영당과 묘소, 그리고 종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남산길 51-4에 위치한 세종시 문화재자료 제7호 금남 남산영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 남이웅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1906년에 지역의 유림이 세운 것이다. 남산영당은 삼문과 영당으로 나뉘는데 영당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들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유물들을 문중에서 세종시에 기탁을 하여 국립공주박물관에 위탁 보관하다가 지난해 10월 25일 조애중의 ‘병자일기’를 포함한 남이웅 관련 유물 68점을 세종시립민속박물관으로 이관한 상태이다.
남산영당의 언덕 아래 입구에는 남이웅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왼편 뒤쪽 남산에는 남이웅과 그의 처 조애중 부부를 합장한 묘소와 묘비가 있다. 묘역에는 대형 봉분에 묘비와 문인석과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곳이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인근 주민들 사이에는 질병이 났을 때 묘소에 있는 문인석에 기원하면 낫는다는 영험함이 전해져 오고 한다.
또 남이웅·조애중 부부가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남이웅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중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도 하며, 이 일대가 임금이 내려 준 사패지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편, 조애중의 남편 남이웅은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 정치권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다. 1687년(인조 15) 1월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끌려갈 때 모시고 다녀왔으며 소현세자 빈 강씨의 사사에 반대하며 사직서를 12번이나 올렸으나 임금이 불윤비답 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1647년(인조 25)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본래 세업이 풍족하여 부자였지만, 법제를 준수하며 자손들을 엄하게 단속하고 사치를 억제해 주위 사람들의 귀감이 됐다.
그런 영향인지 남산영당 옆에 종가가 있는데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고 품격있는 농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인과 함께 지난해 11월 남산영당을 답사하고 있는데 송영희(85) 의령남씨 종부께서 남산영당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함께 묘소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특히 “남산영당에 있는 남이웅 할아버지 영정을 포함한 여러 유물을 박물관으로 싣고 갈 때 얼마나 서운하고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그리고 영정을 비롯한 유물을 박물관에 보내고 지금은 종가 뒤편에 별도의 사당을 마련하여 조상님들 신주를 모시고 있다고 자랑하시는 모습에서 훌륭하신 시댁 조상을 모시고 있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병자일기’의 문학적 가치
‘병자일기’의 저자 조애중은 17세에 남이웅과 결혼하여 남편과 56년을 함께 살게 살고, 남편은 좌의정에 오르고 본인은 정경부인이 됐지만, 병자호란이라는 시대를 잘못 만나 고생을 밥 먹듯 했다.
남편 남이웅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심양에 볼모로 가 고생하면서도 필사본 일기 ‘시북노정기’를 남겼다. 그리고 아내 조애중은 63세의 나이에 여성의 몸으로 많은 식솔과 종들을 거느리고 피란길에 올라 온갖 험난한 고생을 다하며 순탄하지 않은 삶으로 심신이 괴롭고 고단했지만, 적극적이고 끈질기며 슬기롭고 생명력 있게 이를 잘 극복해 나가면서 섬세하고 성실하게 ‘병자일기’를 썼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으로는 고전소설 ‘박씨전’과 ‘임경업전’, 김상헌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이정환의 연시조 ‘비가’ 그리고 현대소설 김훈의 ‘남한산성’ 등이 있는데, 이제 고전수필에 ‘병자일기’를 당당하게 이름 올리고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있게 읽었으면 한다. ‘병자일기’는 사대부가 안주인이 쓴 병자호란과 관련된 또 하나의 역사이며 문학이고, 조선 중기 양반가의 생활사와 민속, 의식주와 관행, 문체 등 중요한 자료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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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대평리 가면 꼭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