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새벽에 귀국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엔 사무총장 10년의 경험은 국가와 국민이 함께 나눌 공공자산이라고 생각한다”는 반 전 총장은 79세의 나이에도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그는 보람 있는 일을 더 포용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지난 2019년 4월 재단을 설립했다. 퇴임 이후에도 “세계 평화와 인류애에 대한 기여”라는 평생의 미션을 지속하기 위해 이듬해인 2018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반기문세계시민센터’를 세웠고, 올해에는 뉴욕에도 센터를 열었다.
그 외에도 유력한 각종 국제기구에 참여하면서 기후위기, 지속가능발전, 인권신장 등을 위해 헌신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 전 총장은 현재 재단과 시민센터 이사장은 물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윤리위원장,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 의장, 보아오포럼 이사장, 글로벌기후적응센터(GCA) 공동의장, 세계원로회의(The Elders) 부의장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영혜가 만난 사람
2.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유엔 사무총장이 된다는 것은 “국제적인 목표물”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짙은 색 정장 차림으로 회의를 주재하는 세계적인 외교관의 모습만 떠올린다면 유엔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사무총장의 역할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영문 회고록 ‘결단의 시간(Resolved)’에서 그의 의복에는 방탄조끼, 방한 기능을 갖춘 점프슈트, 라텍스 장갑도 포함된다고 적었다. 크고 작은 갖가지 위험이 늘 따라다녀 고도로 훈련된 경호대의 호위를 받으면서도 24시간 ‘감시구역’ 안에서 지내야 했다.
“유엔 사무총장 재임 10년 동안 혼자 다니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기자 회견 도중에 바그다드 안전지대에 무장 세력이 발사한 로켓포 3발이 날아들기도 하고, 비행기 착륙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두 차례나 있었다. 나를 암살하기 위해 탈레반이 공항을 폭격한 일도 있었고, IS가 암살을 시도했다는 증거도 나왔다.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같은 상황에서 미션 파서블한 비전을 전파하기 위해 대역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반 전 총장의 비전은 “덜 사용하고, 더 신경 쓰고, 멀리 내다보고, 국경을 초월하고, 공동체를 구축하고, 공감대를 키우고, 평화에 기여하는 것.”
뉴욕에 있는 국제 비정부기구 ‘아시아 이니셔티브(Asia Initiative)’에서는 2017년부터 ‘반기문 여성권익상’을 제정하고 매년 시상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이번에도 시상을 위해 추석 연휴를 물리치고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 기간에 62만 5000명이 모인 워싱턴 컬처 페스티벌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지난 6일 재단 접견실에서 두 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도중 “1970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아오며 수많은 연설을 했지만 60만 명 앞에서 연설하기는 처음이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는 유엔 사무총장으로 10년이란 시간 동안 반 전 총장은 “발언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무방비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사실에는 위안을 느끼지만 “미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 대통령, 어떤 지도자를 봐도 글로벌 리더가 없다. 세계인으로서의 시민정신(글로벌 시티즌십)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자신의 지구상 위치를 뭐라고 규정하든, 우리에게는 행동해야 할 도덕적 책무가 있다. 나는 그것을 ‘세계 시민정신’이라고 명명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것이 놀라운데.
1962년 충주고 3학년 때 백악관을 방문하면서 내 인생의 이력은 시작되었다.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VISTA)’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한국 대표(4명)로 참가했다. “당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존 F. 케네디(JFK)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전율을 느꼈다. 미·소 간 대립으로 냉전이 전 세계를 덮고 있던 시대에 “지금 세계는 국경이 없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세계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외교관이 되어야겠다’고 꿈을 설정하는 결정적인 영감을 그때 얻었다. 당시에는 여러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었다. 내 조국과 가족을 구해준 이 세계가 고마웠다.
-‘JFK Meets JFK’ 일화가 재미있다.
유엔 사무총장이 된 후, 어릴 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보스턴의 케네디 도서관에 가서 그게 사실인지 자료를 찾아봤다고 한다. 그러고는 60년 전 케네디 대통령 연설문과 함께 흑백사진을 액자에 넣어 ‘케네디 대통령이 JFK를 만나다(JFK Meets JFK)’라고 써서 내게 선물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연수(1985)할 때 내 별명이 JFK였다. 자기소개를 하라기에 친구들 앞에서 나를 JFK로 소개했다. “나는 ‘한국에서 막 온(Just From Korea)’ 사람이다. 20여 년 전에 실제로 JFK를 만났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성장하며 얻은 교훈은.
6.25 전쟁 당시 6살이었다. 외가로 피난을 갔다. 충북 증평까지 27㎞를 걸어가는 길에 동산에 올라가면 폭격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어머니(신현순 여사)는 피난 가던 중 누이동생을 낳았다. 전란의 와중에도 인심이 좋아 길옆에 있는 인가로 무조건 들어갔는데 집주인은 기꺼이 방 한 칸을 내줬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출산의 고통을 맞았다. 어머니는 출산 3일 만에 눈 덮인 길을 수십 리나 걸어야 했다. 그때 광경이 내 평생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성장해 가며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여성이 공동체의 발전에 온전히 이바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국수도 삶고, 아버지도 많이 도와드렸다.
-지금껏 받은 선물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초등학교 교과서라고.
아버지 회사가 충주로 옮겨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교실이 부서져 땅바닥에서 수업을 받았다. 일제시대 감옥소에서도 공부했다. 초등학교에서 나눠줬던 교과서는 뒤표지에 ‘유네스코와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인쇄 기계를 기증받아 인쇄한 것’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2012년 9월 ‘글로벌 교육우선 계획’을 창설했을 때 회원국 대표들에게 이 일화를 전했다.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청계천 고서점을 뒤져 그 옛날 사용했던 교과서 세 권을 찾아냈고, 여수에서 엑스포가 개최되었을 때 그 중 한 권(6학년 2학기 산수)을 내게 전달해 주었다. 지금 그 교과서는 음성 반기문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유엔 공직 생활 10년간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를 꼽으라면.
인간이 조장한 지구온난화의 피해를 늦추기 위해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기후 협약 때문에 세계 각국 정상들과 지독하게 협상했고 그들을 설득했다. 부시도 쫓아다니고, 오바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쫓아가 설득을 해댔더니, 오바마가 수전 라이스에게 “아, 저 범생이 같은 친구 때문에 내가 댄스파티에 끌려가는 여학생이 됐다”며 혀를 내둘렀다. 오바마는 자신의 자서전 ‘약속의 땅(A Promised Land)’에 ‘그래서 반기문이란 사람을 존경하게 됐다’고 썼다. 2015년 이후의 국제정세를 돌아볼 때, 그때 협약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기후대응 체제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의 인권 신장과 권익 보호를 위해 헌신했는데.
2010년 유엔여성기구(UN Women)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우리로 치면 여성가족부인 셈인데, 칠레 대통령으로 임기를 막 마친 미첼 바첼레트에게 기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2006년 12월 사무총장 업무를 개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중에 남성 후보를 선호하는 관료주의가 유엔에도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석이 생기면 선임자들로 인사위원회를 꾸리고 최종 후보 3인을 고르는데 처음에는 전부 남자 3명만 명단에 올라왔다. 여성 후보는 “기준에 미달한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낙마한 여성 중에 ‘최고’ 후보를 면접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3년 후 유엔여성기구를 만들었고, 행정직뿐 아니라 평화유지군 군사령관도 여성으로 임명했다. 내가 전 세계에 포진한 유엔 고위관리직을 임명하거나 승진시킨 여성은 150명이 넘었다.
-업무 추진의 중점을 여성에게 두게 된 특별한 이유는.
“진통이 시작될 때, 여자들은 자기 고무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했단다.” 피난길에서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했다. “여자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지 걱정했던 거야.” 어릴 때는 어머니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어린 동생들을 일찍 잃고 평생을 괴로워했을 내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는 이런 비극을 운명적인 위험이 아닌, 아주 드문 예외로 만들기 위해 유엔의 세계적 조직 기반을 가동하겠다고 다짐했다. 21세기에 전 세계 여성들이 아이 낳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면 말이 되는가.
-아내에 대해 말해달라.
여성의 삶을 더 관대하게 이해하도록 격려해 준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말했다. “남자들은 왜 그렇게 속이 좁나요? 우리는 남자의 어머니고 아내고 딸이에요. 여성은 자신의 지위를 남성 수준으로 대등하게 올리려는 것뿐이에요.” 여성은 이제야 겨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은 아내이며, 오늘날 내가 이룬 성취의 지분을 따진다면 아내의 몫이 65%, 나의 몫은 35%일 것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는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성장했다. 우리나라는 극빈 상태에서 OECD 회원국으로 발돋움하였다.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7억 3,4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빈 상태로 살아간다. 그 대다수는 배고픈 채 잠자리에 드는 것을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는 아동들이다. 결핍은 분쟁의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날로 악화되는 빈곤, 불평등과 기아는 사회 공동체의 파괴를 야기하고 있다.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따로 떼어서 해결할 수 없으며, 근본적 해결을 위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어가야만 한다. 나는 앞으로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유엔을 안정으로 이끈 특유의 리더십에 대해.
외교관으로서,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인내와 절제, 경청을 미덕로 삼았다.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좌우명이다.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특히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이런저런 어려움과 부침을 겪으면서 최고의 미덕은 물과 같다는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최고의 협상가는 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고 적응하고 경청하면서 싸우지 않는다. 유엔 사무총장 10년 동안 한결같이 그 마음 그 자세로 임해 각국 지도자와 분쟁 당사국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글쓴이 민영혜 씨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믿음으로 청소년 독서 교육과 진로 코칭, 성인들을 위한 인문 독서 모임을 이끄는 북 큐레이터이자 민주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문화운동가다. 인문 독서 교육 ‘문학과 서평’ 대표와 ㈔한국청소년체험세상 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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