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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이이김김] 추운 겨울, 거리로 나선 이들

2025. 02. 09 by 김세영 기자
▲ 자원재생활동 체험에 나선 기자.

문득 진하고 비릿한, 현실적인 세상 이야기를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모 언론사 기자의 체험기획 시리즈를 보고 난 뒤부터였던 것 같다. 한 번 요동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월간 이이김김’의 이달 주제로 ‘극한 직업 체험’을 제안했다.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에 대한 경외감을 느껴보면서 세상살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보기로 했다. 말 그대로 ‘극한 직업’, 일 자체도 힘들 터인데 한파까지 몰아친 상황. ‘나, 괜찮겠지. 모두, 괜찮겠지?’ 그렇게 극한 직업 체험이 시작됐다.

폭설 속 77세 할아버지와 손수레를 끌다 
2시간 폐지 105㎏ 주워 약 5000원 벌어 
폐지 수집 노인 아닌 ‘자원재생활동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당초 첫 계획은 키즈카페 인형탈 아르바이트였다. 그런데 체험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아 그 대안으로 찾은 게 고독사 특수청소였다. 황금연휴라 불리는 설 연휴가 오기 전부터 여러 업체에 전화하고 기다렸지만 기사 마감일 코앞까지 일이 잡히지 않았다. 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결국 마음에 불을 지펴줬던 모 기자의 기사와 같은 폐지 수집을 택했다.

다짜고짜 집 근처 고물상을 찾았다. 퇴근 후 찾아서 그런지 커다란 대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내일을 기약해야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굵은 눈발이 휘날렸다. ‘눈 오면 안 되는데….’ 그러게 왜 그렇게 미뤘어, 기자를 질타하듯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렸다.

마감 D-2. 7일 오전 7시 30분 무작정 집 밖을 나섰다. 상의 3겹, 하의와 양말 2겹, 단단히 채비하고 맞이한 세상은 하얗고 흐리고 추웠다. 이 날씨에 폐지를 줍는 어르신이 계실까? 하는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종종 목격한 적이 있었기에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40분을 헤맨 끝에 한 어르신을 만났다. 그는 쌓아 놓은 폐지를 갖다주고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눈보라가 몰아친다. 날씨가 잠잠해지길 기다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7일 대전 중구 A 동 한 도로에 빈 박스와 손수레가 놓여 있다. 수거한 박스를 해체해 수레에 쌓아야 한다.
7일 대전 중구 A 동 한 도로에 빈 박스와 손수레가 놓여 있다. 수거한 박스를 해체해 수레에 쌓아야 한다.

6시간 뒤. 오후 1시 30분경 대전 중구 한 고물상. 흐린 날씨는 온데간데 없고 밝은 해가 떠올랐다. 대책 없이 고물상 근처를 서성이는데 할아버지 B(77) 씨가 빈 손수레를 잡아들었다. “같이 하고 싶은데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추운 날씨에 괜찮겠냐는 걱정과 함께. 구멍 난 장갑을 낀 본인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혹시 몰라 더 산 새 장갑을 그에게 건네며 짧은 여정의 막을 올렸다.

종일 내린 눈에 바닥이 꽁꽁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약 50㎏에 달하는 손수레를 함께 밀고 끌며 무게를 나눴다. 까만 눈이 질척거리며 신발에 달라붙었고 발걸음이 자꾸 미끄러져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기자와 할아버지 B(77) 씨가 해체한 박스가 도로 위 쌓여 있다.
기자와 할아버지 B(77) 씨가 해체한 박스가 도로 위 쌓여 있다.

B 할아버지는 “눈이 많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속도가 안 난다. 원래 같으면 집에 있는데 밥 먹고 할 일이 없어 해 뜬김에 겸사겸사 나왔다. 보통은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일하고 밥 먹고 오후에 다시 나와 서너시까지 더하고 집에 간다. 용돈벌이로 매일 한다”라고 설명했다.

B 할아버지는 전봇대마다 버려진 폐지를 주우며 손수레에 차곡차곡 쌓았다.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는 작은 박스보다 재활용이 가능한 큰 박스를 위주로 수거했다. 수레가 절반 정도 찬 것 같아 “이 정도면 얼마 나와요?”라고 물으니 “500원도 안 나온다”는 무심한 답이 돌아왔다. 미끄러운 길에도 그가 발길을 계속해서 재촉한 이유다. 하루 평균 6000원. 그가 폐지를 주우며 버는 돈이다. 박스가 많이 나오는 슈퍼나 일부 식당, 전통시장 등은 폐지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 골목 곳곳에 놓인 폐지를 빨리 수거해야 한다. 그래도 이날은 추워서 폐지가 많은 편이라고 했다.

척 보기에도 고된 이 일을 그가 택한 건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가치관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이 일이 많이 벌진 못해도 자유가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와 함께 걸으며 폐지를 수거하는 내내 기자를 쳐다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이 눈앞을 스쳤다. 어쩌면 불과 며칠 전 기자의 눈빛이었을지도 모를 것들. 온전히 자신의 삶을 위해, 쓰레기가 아닌 재활용 가능한 큰 박스와 고철을 수거하는 이들을 편협한 동정으로 바라봤다는 생각에 창피함이 들었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자원재생활동가’라 부른다. 재활용이 힘든, 버려진 물품을 수거해 자원으로 만드는 노동자란 뜻이다. 짧은 시간 B 할아버지와 함께하며 느낀 건 자원재생활동가 일의 숭고함이었다.

할아버지 B(77) 씨가 수레를 끌고 있다.
할아버지 B(77) 씨가 수레를 끌고 있다.
고물상 저울에 수레가 155㎏으로 측정됐다. 2시간 동안 폐지를 주운 결과다.
고물상 저울에 수레가 155㎏으로 측정됐다. 2시간 동안 폐지를 주운 결과다.

시간이 지나자 다시 거세게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쌓인 눈이 바람에 휘날리며 눈보라를 일으켰다. B 할아버지는 연신 손이 시리다며 기자가 가져온 핫팩으로 손을 녹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손가락 감각이 마비되다 못해 굳을 정도로 바람이 찼다. 얇디 얇은 일회용 마스크의 보온력에 감탄이 나왔을 정도니 말이다. 지치지 않고 내리는 눈에 결국 B 할아버지는 오후 3시에 퇴근을 결정했다. 젖은 장갑을 끼고 더 일했다가는 동상에 걸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2시간 넘게 수집한 박스의 무게는 105㎏. 수레 무게까지 155㎏이 나왔다. 노고의 값어치는 불과 5000원이었지만 그게 이 일의 값어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고물상에서 짧은 여정을 마치며 할아버지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지막까지도 거듭 기자만을 걱정하던 할아버지. 맑고 투명한 눈과 달리 투박했던 그의 손. 잊지말아야 할 손이 하나 더 는 겨울이었다.

글·사진=김세영 기자 ksy@ggilbo.com

​갑자기 몰아친 눈보라에도 할아버지 B(77) 씨가 굴하지 않고 빈 박스를 수레에 쌓고 있다.
​갑자기 몰아친 눈보라에도 할아버지 B(77) 씨가 굴하지 않고 빈 박스를 수레에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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