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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1996년 1월 6일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

[노래이야기]

2020. 01. 05 by 차철호

"김광석, 
 그의 죽음에 대해선 
 아는 게 없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홧김에 실수로 죽었거나, 
 아니면 누가 죽였거나." 

 

  #1. 영화 클래식(2003)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나, 우연히 우연히 그러나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랑이었나.

준하(조승우)는 주희(손예진)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졸업 후 군에 입대, 월남으로 파병을 가게 된다. 파병 반대 시위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태수(이기우)에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희는 파병장병 환송식에서 준하를 찾는다. 태극기 흔드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준하를 찾아 헤매는 주희의 다급함 사이로 하모니카 소리가 천천히 깔린다.

"준하야, 준하야." 
흐느끼며 열차 창문을 두드리는 주희. 
그러나 울면서 애써 외면하는 준하.
"살아서 와야 돼."

그 사이로 김광석의 목소리가 섞인다.

그대 떠나 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 내리는 못다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2. 목걸이    

참다가 참다가 열차가 출발하자 결국 뛰쳐나가는 준하. 주희는 목걸이를 벗어 준하에게 전해준다. 

"준하야, 꼭 살아서 와야 돼."

몇년 후 재회한 준하와 주희.
"피아노 치는 소녀네. 저거 우리집에도 있는데. 저걸 보면 주희가 피아노 칠 때 생각이 나." 

전쟁터에서 시력을 잃은 준하는 이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연습한 대로 말을 건넸지만, 주희는 준하의 눈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주희가 준 목걸이를 다시 찾으러 갔다가 눈을 다쳤던 준하. 이 장면에서 다시 흘러 나온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 버리기
못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3. 김광석 4집  

이 영화엔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한성민의 '사랑하면 할수록',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등이 OST로 삽입돼 인기를 얻었는데, 대부분 영화 제작 전에 발표된 노래였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은 2001년에, '고백'은 2003년 1월에 발표된 노래다. '사랑하면 할수록'도 푸른하늘 유영석(화이트)이 1996년 발표한 '회상'을 리메이크 한 곡이다.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94년 발표한 4집 '네번째' 앨범에 실린 곡이다.

이 앨범에 함께 실린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는 김광석이 살아 있을 때 유명했던 반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사후에 더욱 유명해진 노래다.

이별, 혹은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자는 노랫말 때문이었는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후에 더 많이 알려졌다.

 

  #4. 류근   

이 노래의 노랫말은 시인 류근 작품이다. 

군 제대 후 등록금도 못 낼 정도로 지독히 가난했던 시인은 학교 후배의 권유로 노랫말을 썼다. 등단까지 한 시인이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하룻밤에 29곡의 가사를 썼다.그 중 하나가 이 노래다.

"연락을 받고 녹음실에서 처음 김광석을 만났다. 노래 작업이 이미 끝나 있더라. 들어보라는데 처음엔 정말 실망했다. 노래를 ‘이따구로’ 만들었나 싶었다. 전주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슬픈 가사를 썼는데 ‘쿵작쿵작’ 포크락을 입히니 이상했다. 솔직히 내심 ‘이문세풍’의 노래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50만 원을 주더라. 각종 빚에 시달렸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당황했다. 한창 내 가사를 가지고 5집을 작업하던 때였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한동안 ‘뭐 좀 아는 것 있느냐’는 전화도 많이 받았다. 망연자실, 마음이 정말 아팠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아는 게 없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홧김에 실수로 죽었거나, 아니면 누가 죽였거나."  -출처: 詩人에게 좌·우파가 어디 있나… 난 낭만주의자(월간조선 2013년 11월호)

  #5. 유서   

1996년 1월 6일, 김광석이 세상을 등지기 불과 7시간 전 모 케이블방송에서 공연을 하였고, 그때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의 분위기와 연결 지어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란 추측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죽은 그날에도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내와 맥주 4병을 나눠 마실 정도로 가정적인 문제는 별로 없는 사람이라 알려져 있다.

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노랫말에 배경이 있다면 김광석이 아니라 류근의 사연이었다.

시인은 '먼 전생'의 일을 회상한다.   

"군 복무 시절 사귀던 연인을 선배한테 빼앗겼다. 당시 7사단 5연대 최전방에 있었는데, 아침마다 실탄 갖고 GP에 오르며 ‘오늘은 반드시 죽어야지’라고 생각했다. 내려올 때 노을 보며 하루만 더 견뎌보자고 한 게 한 달 동안 반복됐다."

  #6. 류근의 어떤 시  

너무 아픈 사랑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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