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는 사전투표를 끝내고 본투표만을 남겨 놓고 있다. 이틀이 지나면 서로 공방을 벌이던 정쟁의 장을 끝내고 서로 상대를 끌어안고 존중하며 평화와 번영을 위한 화합의 장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에 본고는 그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붕당을 초월해 화이부동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옳은 것을 구하고자 했던 만회 권득기와 탄옹 권시를 배향한 도산서원(대전 서구 탄방동)을 산책했다.

도산서원 함덕사에서 바라본 도산서원.
도산서원 함덕사에서 바라본 도산서원.

◆ 만회와 탄옹의 삶과 철학

만회 권득기(權得己)는 1570년(선조 3) 경기도 양주에서 아버지 예조판서 권극례와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고 1618년에 고산도찰방이 됐다. 그러나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무도함을 개탄해 관직을 버리고 충남 태안의 바닷가에서 야인생활을 하며, 도학을 하고 도의를 연마하여 고절의 선비로 추앙받았다.

또 후손에게는 학문의 목적을 과업(과거)에 두지 말 것을 당부하며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지지 말아라.”라는 십자훈을 남겨 가훈을 넘어 산림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만회 권득기는 선조와 광해군을 거쳐 인조의 시대를 살아간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철저한 구시(求是)의 학자였다. 구시를 강조한 그는 차선은 선이 아니라고 여기며 철저하게 지선(至善)을 목표로 살았다. 또 문의·의리·사증을 바탕으로 다각적으로 경전을 해석했다. 그가 남긴 ‘맹자참의’와 같이 의리적 해석으로 일관한 당시의 주자학적 해석 방법과는 변별되게 시의에 맞게 경전의 본의에 다가서는 의미 있는 시도를 했다. 저서로는 ‘만회집’과 ‘연송잡기’가 있다.

탄옹 권시(權諰)는 1604년(선조 37) 한성 남쪽 소문동에서 아버지 권득기와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나 가학을 계승했다. 탄옹은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1609년 6세에 어머니를 잃고 부친의 훈도 아래 엄격하게 자랐고 그 자질이 명민하여 일찍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네가 이미 따랐으니/ 내 작은 마음 가는 곳도 너는 응당 알았으리./ 슬픔과 기쁨, 근심과 즐거움에 네가 짝하니/ 굽고 곧고, 바르고 삐뚤음에 네가 스승이 되리로다 - 권시, 「影」, 탄옹문집 상

이 시는 탄옹이 9세 때 ‘그림자’를 제목으로 철학적 함의가 있는 시를 써 주위를 놀라게 한 작품으로 주변에서는 그를 안자라 칭했다.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가 1649년 여러 요직을 거쳐 승정원 승지가 되고 1659년 한성부 우윤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 이듬해 1660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상복을 입는 문제에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 문제가 벌어졌을 때 자신이 속한 서인의 당론을 따르지 않고 남인 윤선도를 변호하여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됐다. 그 후 1668년 송준길이 주청하여 한성부 좌윤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현재 대전시 탄방으로 내려와 도산 기슭에다가 서당을 짓고 13년 동안 학문을 강론하며 도학 및 예학과 경세론을 펴내어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

탄옹은 탄방에서 생활하면서는 야곡 조극선, 복천 강학년, 치휴 정선, 각회 권정기,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과 교우했다. 특히 인천에서 회덕으로 이사 온 치휴와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그와 교류하며 그의 집 주변에 있는 ‘치휴팔경’(탄옹문집 상)을 시로 노래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탄옹집’ 등이 있다.

탄옹 권시의 묘소와 신도비.
탄옹 권시의 묘소와 신도비.

◆ 도산서원과 탄옹의 묘소

도산서원은 만회 권득기와 그의 아들 탄옹 권시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탄옹의 사후 1676년 지방 유림이 뜻을 모아 탄옹이 '참다운 선비로서의 모범'임을 내세워 충현서원에 추배할 것을 시도하였지만 뜻이 이뤄지지 않자 탄옹의 강학처인 여택재가 있던 자리에 1692년(숙종 18) 도산향현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그리고 1711년(숙종 37) 사액을 받았으나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이후 1921년에 다시 단을 조성하고 제향을 계속하여 오다가 1968년과 1974년 2차례에 걸쳐 안동 권씨 종중에서 전체를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산서원은 지형상의 특성으로 학생들이 휴식을 즐기는 유식 공간이 생략됐고 남서향으로 배치된 특징이 있다.

먼저 강학공간인 향직문은 명교당의 정문이며 서원의 외문이다. 그리고 향직은 곧은 것을 구함, 즉 진실과 정의로움을 말하며 구시를 염원하는 의미가 있다.

도산서원 향직문에서 바라본 강학공간인 명교당. 동재 시습재와 서재 지선재가 마주하고 있다.
도산서원 향직문에서 바라본 강학공간인 명교당. 동재 시습재와 서재 지선재가 마주하고 있다.

강학공간의 핵심으로 중앙에서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는 명교당은 강당이다. 여기에서는 유교 서원의 본령답게 강당 곳곳에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편액들이 눈에 띈다. 특히 강당 좌우 면벽에 있는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의 친필 전자를 목판에 전각한 ‘每事必求是 無落第二義’라는 만회의 십자훈 대련이 '구시'와 '의리'를 강조하고 있다. 명교당 앞에는 원생들이 기거했던 동재 시습재와 서재 지선재가 있다.

다음 제향공간은 태극 문양을 그려 넣은 내삼문인 유정문을 통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현을 제사하는 함덕사는 이 서원에서 가장 위 구역인 우측 언덕에 자리 잡은 사우로 덕성을 함양하여 깊이 한다는 의미가 있다. 다른 건물들이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으로 화려하지 않게 했다면 이곳은 만회와 탄옹 부자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단청을 간결하게 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이다.

도산서원의 제향공간으로 앞 건물은 내삼문 격인 유정문이고 뒷건물이 함덕사이다.
도산서원의 제향공간으로 앞 건물은 내삼문 격인 유정문이고 뒷건물이 함덕사이다.

도산서원은 이밖에 부속 건물로 전사청과 재실 경모재, 만회와 탄옹의 문집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고 숭모각 등이 있다.

필자는 지난해 도산서원을 답사하고 도산학술연구원을 방문해 관계자의 도움으로 탄옹의 묘소를 관람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간한 ‘탄옹문집’을 기증받아 소중히 간직하며 연구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본래 평범한 도심 속 야산이었으나 이곳 묘소를 남겨서 보존하고 그 주위를 주택지로 개발하면서 자연스럽게 묘 주변 산기슭을 깎고 옹벽을 쳐서 지금은 묘소가 하나의 요새처럼 되어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거리에서 탄옹의 묘소는 보이지 않는다.

탄옹의 묘소는 아파트 2~3층 높이의 옹벽 가운데로 난 반듯한 계단을 올라가든가 도산학술연구원으로 활용되는 도산서관을 끼고 완만한 포장길을 올라야 한다. 그러면 대전의 도심 속에 숨겨진 성지 혹은 요새와 같은 탄옹의 묘소가 얼굴을 반긴다. 잔디로 말끔하게 단장된 묘역의 위쪽에 왕릉을 방불케 하는 ‘탄옹 권시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뒤쪽에는 잘 가꾸어진 멋쟁이 금강송이 묘소를 보위하고 있다.

도산서원 입구에 있는 도산서원연혁비.
도산서원 입구에 있는 도산서원연혁비.

묘소 앞 좌우에는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오석이요 다른 하나는 백석이다. 이는 1672년 보문산 사정동에 처음 매장됐다가 1700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면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또 너른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이 쓴 ‘탄옹권선생신도비’가 하늘을 찌를 듯 위세가 당당하고 위엄있다.

◆ 만회와 탄옹, 그리고 공동체적 삶

만회와 탄옹 부자의 안동 권씨는 송시열, 박지계, 윤선거, 신승구, 윤휴 등 노론, 소론, 남인 그리고 동인까지 당색과 관계없이 17세기 명가들과의 종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장생, 김집 문하의 당대 거유들이었던 송시열·송준길·윤선거·유계·이유태 등 17세기 정계와 사상계를 주름잡던 서인계 학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허목과 윤휴 등 남인 학자들과도 친교를 하였다.

탄옹이 이렇듯 다양한 명가들과 혼인도 하고 학문적 교류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 만회의 뒤를 이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방면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철저하게 선을 지키며 모든 일을 진실하고 의리있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예학에 일가를 이루고 여러 산림의 움직임 속에서 함께 있으면서 어느 한 곳에 휩쓸려 들지 않고 끝까지 자기를 지켜나갔다. 흰자위는 서로 구별 없이 하나로 붙어 있지만, 노른자위는 그대로 독립된 달걀부침처럼 어떤 경우에서도 부화뇌동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구시했던 것이다. 우리 현대의 삶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만회와 탄옹의 십자훈을 다시 생각하면서 어떻게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한다.

방경태 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
방경태 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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