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의 재도전을 기정사실화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후에도 대전을 지키며 문학가로, 대전시민으로 조용한 활동을 했다.낙선(落選) 후 고향을 떠나던 전임 단체장들의 전례도 밟지 않았다.그만큼 그는 대전을 사랑했고, 아쉬운 패배였다.무엇보다 염 후보를 애닳아하는 젊은 대학생부터 직장인, 주부 등 그의 동지들이 눈에 밟혔다.“어느 누구보다 대전을 사랑한다고 자부합니다. 또 동네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잘아는 곳이죠. 대전은 내 인생의 전부이자 모든 것입니다. 제 뼈를 묻을 곳입니다.”선거가 시작된 후 각종 언론매체로부터 가장 많이 주목을 받는 그다. 심적 부담이 될법한데도 여유가 묻어났다.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패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그는 일종의 방어선이었다.여타 시.도들이 한나라당 후보들로 우위가 넘어갈 때 염 후보는 막판까지 버텼다. 박풍(朴風), 박근혜 피습사건 전까지는.결과론적으로 선거에 패배했지만 그의 개인 경쟁력은 전국구로 올라섰다.“솔직히 시민들에게 섭섭함은 없었습니까? (취재기자)”“섭섭함보다 아쉬움은 남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부족해서 그랬던 거죠.”취재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2년 지방선거 후다.당시 민선 대전시장으로 선출된 염 후보는 그야말로 열정적인 시정을 펼쳤다. ‘강골체력, 시민화합주(酒), 민원해결사’ 등은 염 후보를 통해 만들어진 단어이자 문화였다. 염 후보의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에 혀를 내두르는 이도 많았다.자타공인 애주가.하지만 염 후보는 선거기간동안 금주를 선언했다고 한다. 좀 더 지역민을 만나기 위함이지만 그 이면에 이번 선거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가 읽혀진다.어느 누구보다 대전을 사랑했지만 인생역정 내내 학연, 지연 등으로부터 도움받아보지 못했던 마이너리티(소수파)의 한계를 절감했던 그다.“대전시장을 지냈고, 총장도 했습니다. 어찌보면 소수파 인생이라 할 수 없겠죠. 성장과정은 소수파 과정이나 현 시점에서 소수파 인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취재기자가 승합차에서 내리자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고 또 다시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주위를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제가 처한 위치에서 주위와 함께 목표를 이루어냈습니다.”지금도 대전발전을 위해 정치적 생명을 걸고 최선의 선택과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염 후보의 도전이 주목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