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정치에 관심없던 유권자부터
120세 넘는 어르신 발걸음 이어져
각자의 바람과 희망 담은 표 행사
투표소 혼선으로 아쉬운 모습도

헌정이 멈췄다. 정권은 공백에 놓였고 국가는 방향을 잃었다. 시민들은 잊지 않았다. 그 기억은 조용한 결심으로 바뀌었고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 본투표일 대전의 투표소로 이어졌다.
대전둔산초등학교와 대전탄방초등학교에 마련된 대선 본투표소는 정숙했다. 사람들이 모였지만 소음은 없었고 말보다는 눈빛이 오갔다. 표정엔 긴장보다 확신이 깃들었다. 이번 투표는 단순한 의무 이행이 아니라 혼란 이후 공동체가 복원을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혼자이지만 동시에 함께였고 고요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둔산2동 제1투표소가 설치된 둔산초에서는 오전 8시 무렵부터 다양한 연령층의 유권자들이 천천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밀고 온 부부, 휴대폰을 쥔 20대 남성, 기온을 가늠하듯 옷깃을 여미는 중년 여성까지 모습은 달랐지만 발걸음은 일정했다. 남편과 함께 온 이순자(62) 씨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 씨는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왔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탄방초에 마련된 탄방동 제2·5투표소 앞은 다소 혼잡했다. 같은 건물에 두 개의 투표소가 나뉘어 운영되면서 자신의 선거인명부 등재번호를 확인하지 못한 유권자들이 발걸음을 멈추는 일이 잦았다. 안내판을 한참 들여다보거나 휴대폰을 꺼내든 이들의 표정엔 당황과 민망함이 동시에 스쳤다. 김 모(41) 씨는 “사전안내문을 봤는데도 번호가 어딨는지 모르겠다. 한 건물 안에 두 개나 있으니 헷갈릴 수밖에 없다. 앞으론 조금 더 눈에 띄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물론 현장 안내요원들이 분주하게 번호를 확인해주며 혼선을 줄였지만 투표소 접근성에 대한 시민들의 피드백은 분명하게 남았다.
기표소로 향하는 줄이 천천히 움직이는 가운데 주변을 살피던 정현우(33) 씨가 눈에 띄었다. 정 씨는 “물가, 주거, 취업 등 요즘 같은 시대에 젊은 세대가 숨 쉴 틈이 없다. 현실을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을 뽑으러 왔다”라고 했다. 그의 말은 가볍지 않았고 한 줄 앞에 선 이들 중 몇 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묵묵히 정 씨의 이야기를 듣던 박성호(55) 씨가 조금 다른 생각을 전했다. 박 씨는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안정이 먼저다. 선거가 새로운 싸움을 여는 계기가 아니라 갈등을 정리하고 사회를 다시 붙잡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소망했다.
이날 투표소에서는 대체로 정숙한 분위기 속에 절차가 이뤄졌고 시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수행했다. 조기 대선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임에도 유권자들은 끝내 투표소로 향했고 그 한 표 한 표는 혼란의 끝을 지나 도달한 질서의 선언이었다.
선거사무와 관련한 아쉬운 모습도 노출됐다. 중구 태평2동 2투표소에서는 아동 동반 투표를 둘러싼 혼선이 있었다. 오전 9시 20분경 한 유권자가 아이와 함께 입장하려다 투표사무원의 제지를 받았고 곧이어 다른 관계자가 ‘미취학 아동은 동반 가능하다’며 정정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다. 이 모(50) 씨는 “아이에게 투표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어 데려왔는데 당황스러웠다. 유쾌한 투표가 되려면 현장 대응이 더 매끄러워야 한다. 또 기표소에 가림막이 없어 참관인의 시선이 느껴져 불편했다”라고 지적했다.
반면 충북 옥천에서는 한 세기를 살아낸 유권자의 발걸음이 투표소를 울렸다. 청산면 삼방리에 사는 이용금(121) 할머니는 딸의 부축을 받으며 청산면다목적회관 투표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민등록상 1904년생으로 확인된 충북 최고령 유권자인 이 할머니는 “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마음을 다잡고 왔다”라고 말해 현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용금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호적이 잘못 작성돼 실제보다 나이가 부풀려졌지만 100세는 족히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