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부장
“어머니, 오늘은 얼마나 버셨어요?”
한 무료급식소 주인장이 넉살좋게 묻는다.
한 눈에 봐도 굴곡진 세월이 서린 한 할머니께서 몸빼에서 꺼낸 것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어 장과 동전 몇 닢이 전부였다. 노구를 이끌고 한 나절 파지를 주워 얻은 수확이다. 밥을 푸고, 국을 담고 자리에 앉은 노파는 눈물 나게 맛나도록 점심을 드셨다.
“어머니, 이 채소 가져다 팔면 얼마나 남아요?”
새벽도 잠에 취한 시간, 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좌판을 벌인다는 한 아주머니가 이날 채소 구입에 쓴 돈은 15만 원 가량이다. 이문은 1-2만 원 선이라고 했다.
“30년 동안 이렇게(채소 행상) 아이들 키웠어요. 적으면 어때요 나 보다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30년 엄동설한도 없는 살림에 자식들 건사하려는 모정은 감히 움츠러들지 못하게 했나 보다.
“어머니, 언제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하셨나요?”
44년이라고 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맨 몸뚱이로 고향을 떠났다는 그 어머니, 하루 칼국수 한 그릇으로 등짝에 붙은 허기를 달랬고 배가 고프면 맹물 그냥 먹기 퍽퍽해서 소금 한 움큼 집어 삼켰단다. 칼국수 한 그릇도 호사였을지 모른다. 소금보다 짠 눈물이 마르지 않았을 터다.
TV 다큐멘터리 중 가슴을 후벼 판, 자식들을 위해 후줄근한 껍데기로 남기를 자처한 어머니들의 이야기 모둠이다.
좋은 말로 단련됐고 실상은 고약하게 인이 박힌 이들에게 노동은 싫어도 마다할 수 없는 각성제와 같다. 수족을 놀리지 않으면 몸 구석구석이 쑤시고 아프다고 거북이 등껍질 같은 손의 어머니들은 말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다. 이 세상에 맛난 음식 싫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것도 배곯기를 밥 먹듯 했던 시절이라면 자장면이 다 뭔가. 짠지 얹어 먹는 찬밥 한 그릇도 꿀맛이었을 것이다. 당신들 입으로 들어가는 건 10원 짜리 하나도 아까워했고, 당신 입성은 볼품없었다. 쪽잠 아까워하며 당신들 말마따나 몸뚱이 부서져라 진동한동해도 내 자식들 입으로 들어가는 끼니 챙기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미안하고 미어지는데 공납금 마련 못해 퉁퉁거리는 자식 볼기짝 때려놓고 훔친 눈물이 얼마였겠는가. 회멸하면 좋을 법한 가난은 그렇게 질리도록 질겼다.
가난에 저당잡혀 반추하면 설움부터 밀려오는 것이 그의 청춘인데 늘그막에도 다리 뻗고 살 팔자는 못되는 모양이다. OECD 국가 중 노인빈곤율 1위, 노인복지지출 꼴찌라니 속사정 안 들어도 알 일이다.
어머니, 누구에게는 보통명사고 누구에게는 고유명사인 그 이름만으로도 괜스레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우리 어머니들은 가난을 이고도 너른 가슴을 내주고, 또 내주고 당신 가슴에 자식이 박아 놓은 대못까지 지긋이 품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판했다. 역사적인 취임식에서 그는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노라’고 약속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대내외적 환경이 뭐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고 보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여성 대통령이니 국민의 어머니다. 넷 에움이 먹먹하다고 풀 죽을 것 없다. 몰지각한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 지켜낸 이가 어머니들이다. 변변한 밥상 차려 주지 못하고 여 보란 듯이 챙겨주진 못했어도 맹목적인 사랑을 비벼 애면글면 키워냈다. 여자가 아닌 어머니였기에 그것이 최선이었다.
당장 행복을 내놓으라며 악머구리 끓는 조급한 목소리는 괘념할 필요 없다.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열겠다는 일성, 그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자면 자식들 마음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너희들 고생하는 것 다 안다며, 기특하다며 손을 내밀고 머리를 쓰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줄 알고, 잘난 자식보다 부족한 자식 한 번 더 품어줘야 한다. 모정(母情)이 경영하는 나라라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의 답은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