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디 소중한 것은 가까이 있어도 잘 모르고, 잘 보지도 못하는 법이다. 때늦은 어느 순간에 부지불식의 실수에 자책하며, 힘겹게 아스라한 추억을 되살려보기도 한다. 누구든 건강을 잃게 되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되며,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없게 되면 세월에 무게를 더하며, 점점 더 짠한 그리움과 회한(悔恨)에 고개를 젓는다.비단 인간사의 정뿐이겠는가.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한시도 살 수가 없음에도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만물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고,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태양도 늘 저 높은 그곳에 떠 있는 둥근 빛덩이로만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우리는 생명과 직결된 소중한 것들조차도 가치를 깨닫지 못한 채 덧없이 지나치며 살아가다 보니 사회라는 유기적 구조 속에서 서로가 불가분의 협력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상호간 존재의 소중함마저 잊고 산다. 아쉽게도 없어진 뒤에야 소중함을 자각하게 된다.소소한 분야일지라도 어느 한 곳이 멈춰 서면 사회는 금세 기능이 마비되면서 혼란에 빠져들고, 원 상태로의 회복은 어마어마한 시간적 경제적 대가를 요구한다.그래서 사회적 가치 기준에 따라 특정 직업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히 구분되긴 하겠으나 어느 분야도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불호가 분명해 나서서 선택하고 싶지 않은 분야일수록, 그 분야의 종사자일수록 공기처럼 평소에는 모두가 별 관심이 없으며, 심지어는 무시하기도 한다. 공기처럼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어 열심히 굴러가지만 귀천(貴賤)의 사회적 잣대는 여전히 냉정해 상대적으로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아무리 화려하지 않고, 원치 않는 직업이어도 그 업종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이 존재하기에 사회가 건강하고, 내가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선택의 후순위에 두거나, 기피하는 업종일수록 그들의 건전한 사회활동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건물에서 청소를 하는 노동자들의 인권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따뜻한 밥 한 끼와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과제란다.계단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심지어는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이들의 어려운 근무환경은 그동안 누구에 의해서도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 돌계단 위에 앉아 온몸으로 체감해야 하는 온기 잃은 얼음장 도시락의 밥맛을 뉘라서 반길 것인가. 숨 쉬듯 그저 무관심한 탓에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쳐 왔다. 이제 이들에게 작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에 눈을 돌려보자. 식사할 공간 확보와 따뜻한 밥 한 끼 제공. 베풀려는 의지와 관심만 있다면 그리 거창한 구호도, 힘에 부치는 난제도 아니다. 이들의 꿈이 너무 커 한꺼번에 해결이 벅차다면 먼저 건물 내 가능한 공간을 물색, 인간다운 식사가 가능하도록 배려하자. 그 다음 따뜻한 밥 한 끼 제공하는 가슴 벅찬 배려가 추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좀 더 관심을 키워 보자.시작이 반이다. 비용 부담 등 선결과제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우선 한 가지라도 먼저 시작한다면 다른 한 가지는 시기의 문제일 뿐 머지않아 해결의 기회를 갖게 되리라 확신한다.나눔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 출발할 때, 배려는 나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베풀 때 더욱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이다. 감사해야 할 소중한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는 무수히 많다. 감사한 존재인 것을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다. 매사 감사하고 살자. 서로 도우며 살고 있는 우리 이웃, 그들에게 작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에 모두가 지혜를 모은다면 우리는 언제나 건강하고 밝은 사회에서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