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부장
스미싱(Smishing)이 활개 치고 있다. 수법도 빛의 속도로 진화해 ‘눈 뜨고 코 베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닌 모양이다. 누군가 좋겠다며 비아냥된다. 2G폰을 쓰는 사람들은 스미싱의 마수에 걸려들 일도 없다나 뭐라나.
모임 시간이 변경됐다. 나만 몰랐다. 어찌된 일이냐고 퉁명하게 물었더니 카톡으로 전달했단다. 내 휴대전화가 묻는다. ‘카톡이 뭐예요?’
소싯적 친구 몇몇이 유일한 그러나 수동에 가까운 내 SNS, 페이스북을 통해 두문불출 타향살이 친구에게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곤 왜 무심하게 페이스북에 반응이 없느냐고 타박한다. 회사 노트북을 켜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하니 20년 세월에도 변한 게 없다며 원시인이란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내가 ‘스마트하기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실언을 난사하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기계치니 신통방통 도깨비 방망이 같은 스마트폰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이와 다름없다. 더구나 기계를 통한 소통 방식은 영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아 공연히 거부감이 앞선다. 하루가 다르게 스마트해지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부류인데 그렇다고 생활이 불편할 것도 별로 없다. 신변잡기 공유하고 각자 일상과 생각에 몇 자 평을 올리는 잦은 수고의 소통방정식보다는 궁금한 일 있으면 육성으로 전하고, 몸이 멀어 맞대면하기 어렵고 할 말 길다 싶으면 이메일로 교감하며 나름 여간내기라고 여긴다. ‘안’ 스마트폰과 이메일도 기계는 기계니까.
게임을 하고,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듣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유용한 각종 정보를 검색하고 상상 초월 첨단기술의 보고(寶庫)를 외면한 채, 스마트한 삶을 비켜선 채 반거들충이 취급받는 게 썩 내키지는 않는 기계치의 눈에서 듣는 이에 따라서는 핀잔도 되고, 노파심도 되고, 오지랖도 되는 걱정 한 자락을 늘어놓는다.
손 안의 세상에 자신을 가둬둔 포스로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이어폰을 낀 채 뚫어져라 액정을 바라보는 게 그들의 공통점이다.
도로나 아파트 차도에서 곁눈질도 하지 않고 직진 보행으로 운전자들을 아찔하게 하는 사람, 오가는 길 막아선 채 다른 이들 안중에는 없는 사람,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가 앞에 서도 당최 모르쇠 모드를 풀지 않는 사람….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설문조사 결과, 스마트폰 사용자가 외우는 전화번호는 평균 7.2개란다. 좀 야박하다. 이 조사에서 ‘스마트폰이 삶을 똑똑하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61.4%가 ‘그렇다’고 답했다니 TV 광고를 점령할 만큼 앞 다퉈 출시되는 첨단기술의 막강한 힘이 느껴진다. 반면 똑똑해지지 않았다는 축에서는 ‘중독된 듯 늘 스마트폰을 끼고 있다’, ‘머리보다 손이 우선한다’, ‘빠른 것에 익숙해져 인내심이 부족해진다’, ‘신상정보 노출이 쉬워졌다’ 등에 반감을 덧댔다.
‘디지털 치매(Digital Dementia)’ 라는 용어가 있다. 물론 어른들은 모르는 신조어일 게다. 휴대전화나 PDA, 컴퓨터 등 다양한 디지털 기기에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 뇌를 놀리는 대신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게 된데 따른 부작용, ‘스마트의 보복’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그래서 높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수단으로 기계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의 발달이라고 했고 하루가 다른 기술의 진화에 열광했다. 요즘 세상에서 기계, 그것도 스마트 기기는 수족을 넘어 삶 그 자체를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총아다. 미련한 기계치의 눈으로 봐도 그렇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몸에 좋은 약도 잘못 처방하면 독이 되는 것처럼 똑똑하게 이용할 때 스마트라는 이름값을 하는 법이다. 사람이 기계에게 정신까지 맡겨서야 쓰겠는가. 그럴싸한 광고로 인간미를 포장해도 사람 냄새는 흉내 낼 수 없다. 스마트한 세상에서 사람 냄새가 그리운 건 왜 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