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전 살던 집 앞에 한 슈퍼마켓이 있었다. 말이 슈퍼지 동네 구멍가게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다. 본디 동네 슈퍼라는 것이 한 블록 건너 한 곳 정도로 생겨나 주변 사람들을 고객으로 삼아 살아가는 생계형이고 보니 그리 크지도 않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생필품을 위주로 구색을 갖춘 인정이 묻어나는 곳이다.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하루 장사를 마감할라 치면 생물은 덤으로 건넸으며, 어린아이들이 군침 도는 오색 사탕에 이성을 잃고 가게로 진입하면 한 알 정도는 기꺼이 희사해 아이들에게 기쁨도 안겨주는 인심 넉넉한 가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의 얼굴은 잿빛이 돼있었다. 코앞에 또 다른 슈퍼가 문을 연 것이었다. 두 사람 겨우 먹고 사는데 또 하나가 생겨 앞일이 걱정이구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앞섰으나 그 걱정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 두 가게는 크기도 비슷했고, 상품의 양과 질도 큰 차이가 없었다. 젊은 주인장의 새 업소가 훨씬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박힌 돌은 굴러 온 돌에게 쉽사리 자리를 내주지는 않았다. 두 가게는 서로가 질 새라 큰 친절을 덤으로 얹어 주었고, 야채와 생선 등은 새벽같이 농수산시장을 드나드는 바람에 항상 신선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두 가게의 공정하고, 건전한 경쟁 덕분에 이웃 주민들은 친절한 가게에서 항상 질 좋은 상품을 구매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더불어 두 가게의 경쟁은 멀리 이웃한 주변 가게의 고객마저 유인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업소는 늘었으되 매출은 줄지 않아 이 부부는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다.두 가게가 서로 경쟁하며 함께 매출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두 곳의 규모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정한 경쟁이었다. 만약 규모와 체계화된 서비스를 비장의 무기로 휘두르는 요즘 같은 대기업형 슈퍼마켓(SSM)과 동네슈퍼 간의 불공정한 경쟁이었다면 분명 박힌 돌은 금세 굴러온 돌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을 것이다. 대기업의 막강한 자본력을 등에 업은 SSM의 동네상권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동네 슈퍼가 하나 둘 눈물을 머금고 폐업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으며, 가산을 탕진한 그들은 노동판으로, 일용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모진 삶의 끈을 부여잡아 보려는 처절한 몸부림도 무위로 끝나버리는 냉엄한 현실 앞에 풀죽은 민초(民草)들의 절규가 메아리치고 있으니 이 땅에 과연 흔히들 말하는 그 ‘공정(公正)’이 있기는 하나 싶다.무기력함에 좌절하고, 속수무책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동네를 떠나가는 가련한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거라 믿었던 국가에 원망을 던져보지만 경쟁력을 갖추어 대항하라는 것인지 여전히 속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호랑이와 토끼의 싸움처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와의 싸움이며, 피 흘리며 스러져갈 결과가 뻔히 예측되는데도 무모한 싸움이 왜 멈추지 않는지, 왜 정부는 보호의 손길을 내미는 데 소극적인지 안타깝다. 호랑이를 지혜롭게 물리치는 우화 속 토끼라도 되어 보라는 것인지, 경쟁력을 갖추면 토끼도 호랑이와 싸울 만하니 해보라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문어발처럼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대기업은 포식자 SSM의 선전에 마치 고무된 듯 편법을 동원하면서까지 동네 진출의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SSM의 동네슈퍼 초토화는 한마디로 대기업의 ‘민초사냥’이다. 담장이 둘러싼 좁은 공간에서 사냥감으로 쫓기는 민초들의 속은 시꺼멓게 타다 못해 녹아내린 지 오래며, 더 이상 버티며 달아날 기력도 고갈됐다.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시작된 초대형 마트의 도심 진출에 전통시장이 초토화되고, 이마저도 모자라 동네 상권까지 모조리 장악하려 드는 가진 자의 사냥에 민초들이 모두 희생되도록 더 이상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굳이 헌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가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할 의무가 있다.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정부는 당장 SSM의 사냥을 멈추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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