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장

형언할 수 없는 후광이 그의 얼굴을 통해, 그의 몸짓을 통해, 그의 손짓을 통해 어릴 적 한 교회와 목사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순결한 종교’에 등 돌린 불신을 어루만졌다. 가난과 함께하는 종교, 고통과 함께하는 종교, 소외와 함께하는 종교, 무소유를 닮은 소탈한 종교, 그 민낯은 순수의 카타르시스를 전이했다.
가진 자들을 환대하고, 허접한 동네 아이들은 교회 놀이터 출입을 금하며, 피를 흘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그 동네 어린 아이의 눈물을 외면한 목사와 교회의 잔상을 ‘극히 일부 못난 종교’라 타이르며 허공 속 연기로 태워버린 느낌이랄까.
그에게서 아베 피에르 신부를, 돔 헬더 카마라 신부를, 안젤름 그륀 신부를 소개받았고, 그 신부들의 삶을 잠시 잠깐 동행하게끔 인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은 고통이 침전된 사람들에게로의 ‘의리’ 였다. “고맙습니다. 교황님”
영화 ‘명량’이 공전(空前)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무엇이 남녀노소 숱한 사람들의 발길을 견인하는지 해석은 분분하다. 재미있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기대 이하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애국심을 덧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 시대를 난세로 규정하며 리더십의 영웅을 향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9000원 짜리 영화로 취급하면 이 같이 다양한 1인칭 관찰자 시점은 자유다. 그러나 제 나라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서 구국의 표상인 ‘이순신’을 마치 요즘 들어 일개 영화 때문에 반짝 주목받는 인물로 해석하는 건 아닌지 거북하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것도 왕과 그 주변으로부터 무시와 모략을 당하면서도 백의종군하며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성웅(聖雄)은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존속돼야 할 거룩한 충(忠)의 가치다. 물론 그리 대접하지 않는 현실을 꾸짖고 환기시킬 요량이었다면 상업성을 떠나 기특한 영화다.
그를 존경하는 명료한 이유는 신의 경지인 ‘의리’에 있다. 알아주는 이 없는 고통을 나라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의 행적이 신의 경지고,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도리가 무엇인지 이상향의 표석을 세운 그의 행적이 신의 경지다. “성웅이시어 고맙습니다.”
요즘 언어유희로 ‘으∼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고 관점에 따라 시정잡배 같은 ‘뉘앙스의 의리’ 로 뜬 연예인이 있다. 오죽하면 어깨에 힘주고 ‘의리’, ‘의리’하며 전도하겠냐 관대한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의리는 주먹 움켜쥐며 마초의 전유물로 삼을 덕목도 아니고 ‘의리 없는 사회’를 깨우치는 말풍선의 덕목도 아니다. 사전적 의미처럼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리다. 소주 잔 기울인 뒤 어깨동무하며 배신을 경계하는 반동(反動)의 표현으로 사용하면 참으로 저급해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의리는 말로 지키는 게 아니라 조용히 행동으로 보여야 할 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이들처럼 오죽하면 의리가 뜨는 상품이 됐겠는가 싶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침은 사람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도리인데 그 도리를 이 사회가 잡도리하지 못하니 외침의 의리가 활기 돋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꼬인 비판의식이 나댄다.
의리를 지키면 손해보고, 의리를 지키면 밥 굶기 십상이고, 의리를 지키면 도태되는 기형적인 세상이 의리 마케팅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무릇 성직자라면 낮은 곳에 임하고 소외의 굴레를 품는 게 마땅한 도리다.
무릇 한 나라의 장수는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의 자세로 목숨을 거는 게 마땅한 도리다. 이론이 그렇다. 경중의 차이일 뿐 성직자도, 장수도 대게는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 데 주저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보고 배워야 할 의리의 의미를 곱씹을수록 숙연해지는 건 왜 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