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이사/충남본부장 이 영 호

담배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겨울이다. 호기심의 발로였다. 베이비 붐 세대인 우리 또래는 유난히 많았고 동네에서 악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마을에서 문제만 생기면 우리 또래들의 소행으로 드러나 집집마다 그야말로 곡소리가 나곤 했다.
담배를 처음 접한 그날도 우리는 출타해 비어 있던 친구 할아버지 방에 모여 놀고 있었다. 그런데 방 윗목에 자리 잡고 있던 할아버지의 곰방대와 담배에 시선이 꽂혔다. 누군가가 곰방대에 불열 댕겼고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들이켰다. 어떤 친구는 기침을 하고 어떤 친구는 침을 흘리는 등 방안이 시끌벅적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렸고 동네 선배들에게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
눈이 내린 다음날 등굣길 우리는 동구 밖 묘지 앞에 줄지어 서서 선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눈을 모은 뒤 그 위에 주먹을 쥐고 엎드려뻗쳐를 했다. 그리고 선배의 구령에 따라 내려갈 때는 ‘안 피울게’ 올라올 때는 ‘안 먹을 게’를 외치며 팔굽혀 펴기를 20여 회 반복했다. 금연·금주교육을 받은 것이다. 담배는 안 피우고 술은 안마시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지금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됐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했다.
25년여를 애연가로 살았다. 금연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2002년 8월 28일 폐암투병 중이던 원로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사망했다. 이 사실을 접하고 금연에 들어갔다. 당시 필자는 천안에서 근무 중 이었고 사무실과 숙소에서 하루 2.5갑을 피웠다. 스스로도 너무 많이 피운다고 걱정하던 중이었다. 1년 6개월 정도를 금연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금연과 흡연을 되풀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연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언제든지 금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2007년 7월 1일 다시 금연에 들어갔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금연은 아주 잘한 일임에 틀림없다. 금연구역은 갈수록 늘어나고 담뱃값도 대폭 오른다고 한다. 게다가 물가연동제를 도입해 계속 인상할 방침이란다. 시외버스, 항공기, 기차, 극장, 음식점, 관공서 등 대부분의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이 금연 장소로 지정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1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애연가들은 실내를 포함한 거의 모든 공간에서 당당하게 끽연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흡연을 할 수 있는 공간보다 금지된 공간과 장소가 훨씬 많다. 심지어 흡연 가능 장소에서의 끽연조차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다.
정부가 흡연율을 낮추겠다며 담뱃값 2000원 인상안을 발표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사실상의 증세라는 입장이다. 이 경우 1갑에 3318원의 세금이 부과되고 매일 1갑을 피울 경우 연간 121만원의 세금을 내는 꼴이 된다. 이는 시가 9억 원짜리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부담하는 세금과 비슷하고 연봉 5000만 원 정도를 받는 직장인이 내는 세금과 차이가 별로 없다고 한다.
세금을 많이 내고 잘 내는 기업이나 개인은 모범납세자로 표창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세금을 내고도 흡연자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흡연구역을 찾아 헤매고 다녀야하고 입 냄새가 날까 노심초사해야한다. 또 자녀들이 보고 배울까 걱정해야한다. 이렇게 푸대접 받고 많은 걱정까지 하면서 흡연을 계속해야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 냄새가 없고 주머니도 깨끗해진다. 게다가 가래와 잔기침도 사라지고 용돈도 마디다. 성인병 예방에도 크게 기여한다. 금연은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하고 무조건 남는 장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