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표를 먹고 산다. 태생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지 않고서는 스스로 보따리를 싸거나 시나브로 잊혀 지기 십상이다. 그들의 시선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그래서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탄탄대로를 질주하던 정치인이 제 손으로 플러그를 뽑았으니 일파만파의 파장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랜 고민을 털고 6·2 지방선거 불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완구 전 충남지사 그를 만났다.

지방선거 불출마 약속했으니 지켜야죠
잊혀지는 것보다,
신뢰없는 정치인으로 망가지는 게 더 두렵죠
신뢰
·믿음 있다면 다시 불러 주시겠죠

#1. 자연인 이완구를 만나다

휴대전화 벨소리가 연신 울려댄다. 몇 마디 말을 섞고 나면 며느리 꽁무니 따라다니며 잔소리 늘어놓는 시어머니처럼 대화를 단절시킨다. 선거 지원 사격을 요청하는 한나라당 후보들의 러브콜이다. 싫은 기색 한 번 없이 스케줄을 조율하는 모습에서 백의종군의 바코드가 읽혀졌다.“여기저기서 도와달라고 아우성이네요. 모두를 소화할 수는 없고 먼저 요청한 곳과 당선 가능권 후보들을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거에서 '이완구=불패' 공식은 깨지지 않았다. 필승 보증수표를 파기시키고 남의 선거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 낯설기도 하련만 그의 낯빛은 되레 평온해 보였다.

“선거라는 게 기획 단계부터 치밀하고 정교한 일정 속에서 진행돼야 합니다. 선거를 열 번 가까이 치러본 내 입장에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당이 필요로 하는 만큼 최선을 다해 (한나라당 후보들을) 엄호할 것입니다.”

그는 좀처럼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행보는 늘 간결하고 명쾌했다. 그런 사람에게 불면의 밤이 수두룩했다니 마음고생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퇴 전 도민과 약속을 했습니다. 세종시 원안건설 사수에 도지사직을 걸겠다고. 나도 인간인데 왜 번민과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지사직을 걸겠다는 어휘선택의 의미, 불출마로 인한 파장, 도백으로 뽑아준 200만 도민에 대한 책임, 도정에 미치는 영향, 당과의 관계, 예고된 불출마에도 보내주신 압도적 지지….”

시커먼 실타래를 푼 키워드는 믿음과 신뢰다. 도지사직을 걸겠다고 했던 약속의 실천. 눈 한 번 질끈 감고 못이기는 척 민심의 파도를 탈 만 하건만 더 이상의 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 세상 이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과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약속을 깼을 때 그 다음 말이 제 아무리 화려해도 믿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정치가 불신을 받는 시대에 말이죠. 요즘 들어 충청에 대해 우유부단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을 바꾸는 습성을 논하는 데 이를 안타까워하면서 전철을 밟을 수는 없죠. 제게는 눈앞의 이익보다 약속과 신뢰의 가치가 중요합니다.”

열정을 명함 삼아 공직자와 정치인을 넘나들은 30여 년간 그에게 가정은 늘 뒷전이었다. 자식들 입학식 한 번 챙기지 못했을 만큼 곰살궂게 살펴본 기억이 없다. 도지사직 사퇴 후 근황을 물었더니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을 꼽았는데 웃음을 머금은 부인 이백연 여사의 반응은 영 신통찮았다.책을 읽어도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는 그는 이제 철이 드는 모양이라고 했지만 또 다른 내공을 쌓고 있다는 느낌이 짙게 배어났다.

#2. 정치는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고된 불출마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온 게 사실이다. 심지어 무소속 출마를 가정해도 수위다. 팬 카페 회원 2만 여명이 떼로 출마를 권유했을 정도다. 이완구의 힘이다. 충남지사 선거를 두고 일각에서는 주연 빠진 조연들의 잔치라고 자조 섞어 말한다. 다른 후보들에게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지만 그것이 민심의 편린이다. 그의 불출마로 누군가는 쾌재를 부르고 누군가는 땅을 치고 있다고 한다니 말이다.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로 은근슬쩍 약속을 무시하는 부류들이 있는데 이는 순전히 자의적인 판단입니다. 누가 얼마나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민심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꼴이죠. 불출마하겠다고 했으면 설령 민심이 만류하더라도 불출마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현재 이 전 지사의 신분은 한나라당 평당원이다. 날개를 접은 공백기가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의연하다.

“정치는 이슈의 중심에 서 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기억되는 게 사실입니다. 잊혀지는 것보다 신뢰를 잃은 정치인으로 망가지는 것이 더 두려운 일입니다. 신뢰와 믿음이 있다면 국민들이 다시 불러주고 평가해주리라 믿습니다.”

골목이 아닌 큰 길로 가겠다는 그에게 지방선거 후 계획을 물었다.

“본인의 설계도 중요하나 본질적으로 정치인은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몸이 됐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을 겁니다. 충청 나아가 국가발전을 위한 역할과 활동공간이 있다면 뛰겠다는 생각뿐 구체적인 구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입지를 정해놓은 정치행보는 국민들에게 읽힙니다. 잔수를 두지 않고 호흡을 길게 하면서 멀리 보겠습니다.”

정치인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신의 준수, 그의 얼굴에 전에 없던 주름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다. 그의 상품 가치는 우량주였다. 그를 두고 큰일을 도모할 충청권 맹주라는 수식이 심심찮게 붙어 다녔다. 질주본능을 잠시 접은 전직 지사 이완구의 재기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조력자는 그가 지킨 신의에 대한 민심의 유통기한일 게다.

 

#3. 이완구의 생각

-사퇴가 아닌 탈당 후 충청의 진정한 리더로 거듭났으면 하는 요구가 있었는데.

“짧은 정치사에서 탈당과 당적 변경의 실험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내려졌다. 어떤 명분이라도 그 평가는 냉엄했다. 국민의 수준을 정치인이 따라가지 못한다. (세종시 문제와 관련)장기적으로 본다면 당에 남아 싸우고 설득해 답을 구하는 편이 낫다. 의미와 존재의 이유는 있지만 크게 보면 (세종시 문제 등에서) 지역정당의 한계는 있다. ”

-선거 판도를 진단해본다면.

“혼전 양상이다. 세종시 문제가 이슈화될 수밖에 없는데 이 대목이 우려된다. 세종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의제지만 여기에 함몰된다면 참다운 일꾼을 뽑지 못한다. 본질은 지방선거에 맞춰져야 하고 후보자의 능력과 자질이 평가돼야 한다.”

-도백이 갖춰야할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경험상 행정만 알아서도, 정치만 알아서도, 경제만 알아서도 안 된다. 어찌 보면 무리한 요구인데 균형을 갖춘 사람, 조직을 장악해 본 사람이 적임자다. 도민들이 옥석을 구분할 것이다.

 

-도민들과 도청 가족들에게 한마디 전해 달라.

“이유야 어떻든 죄송하고 송구하다. 그러나 충청의 저력을 믿는다. 생각이 조금 다르더라고 양보의 미덕을 발휘한다면 진정한 충청발전 나아가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찾을 수 있다. 충청들인은 해낼 것이라 믿는다.”

글= 이인회 기자 sindong@ggilbo.com
사진=이성희 기자 token77@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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