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국장

생기발랄한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호기롭게 대통령이며 과학자며 의사며, 선생님이며 즉답을 내놓는다. 전혀 영글지 않은 그러나 푸짐한 꿈 말이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면 오르지 못할 나무 앞에 일찍 풀이 죽은 것인지 꿈을 묻는 사람이 무안하리만치 주저한다. 뜸을 들이더라도 그로서 훌륭한 직업이지만 회사원이요, 공무원이요 하며 이상에서 다소 이지러진 꿈을 말하는 부류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인생 항로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대학입시 즈음이면 그저 씀벅일 뿐이다. 물론 어기차게 꿈을 좇아 진학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게는 대학 입학이라는 관문 앞에 별 뜻 없이 도열하기 마련이다. 그 청춘의 끄트머리에 서면 안타깝게도 청년 실업이라는 거대한 절벽에 맞닥뜨린다. 그들에게 꿈을 묻는 것은 결례를 넘어 차라리 고문이다. 예닐곱 살 아이의 환상 속 꿈은 그렇게 그로부터 20년 동안 조금씩 갉아먹어 종내 가뭇없어진다. 슬퍼하지 말지어다. 이것이 갑남을녀의 자화상이다.
이러구러 직장을 잡고 사회에 발을 내디뎌 내 밥그릇 장만했다고 한숨 돌리면 경쟁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고 돈에 쫓기며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는 데 능통해진다.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인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종잡지 못하며 왜 다들 세월을 쏜살같다고 하는지 주억거릴 새도 없이 새치 듬성듬성한 중년에 다다른다. 그렇게 한 20년을 사는 동안 감식안(鑑識眼)은 희미해지고 노안은 빨리 찾아온다.
누군가 내게 “당신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 꿈은 기자입니다. 적어도 꿈을 이룬 운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혹시 그래서 만족하냐는 둥, 더 나아가 행복하냐는 둥의 오지랖 넓은 관심에 의표를 찔릴까 싶어 일단 말꼬리의 힘을 뺐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질문 요지는 어제와 현재가 아닌 내일, 그러니까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물어온 것이다. 되고 싶은 것은 몰라도 하고 싶은 것은 많은 축이라 때 이른 버킷리스트를 꺼내 보였다. 그랬더니 “부럽다”고 했다. 도대체 무엇이 부럽다는 말인가. 실현가능성을 떠나 하고 싶은 일을 잘 간수하고 때가 되면 해야겠다는 바람도 사치란 말인가. 그가 한탄조로 말했다. “이 나이 먹도록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고 오다 보니 여기 서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루하루가 무미건조하다”는 게 골자다. “주변 친구들이나 선배들 대게는 같은 푸념을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며 지체 없이 맞장구를 치니 그의 낯빛이 한층 개운해졌다.
어떤 직업을 갖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가치 있다는 감식안을 갖기까지 안타깝게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화두는 현재 진행형의 고민거리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원하는 대로 맞갖게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애써 안위한다. 운 좋게 직업으로서 꿈을 이뤘더라도 그것은 시작일 뿐 그 꿈의 최종 행선지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여한이 없게 사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슬퍼하지 말지어다. 이것이 철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르나 나이든 갑남을녀의 자화상이다.
어떤 이는 꿈꾸지 않는 청춘들에게 지청구한다. 아예 사회가 작정하고 나서 꿈을 꾸라 강요한다. 맞는 말이다. 꿈꾸지 않는 자보단 꿈을 좇는 자들에게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다만 꿈의 질료는 상당히 다양하고 성공한 인생의 지표 또한 다양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생각보다 꿈의 품은 널찍하다. 어떤 직업과 어떤 직장보다 어떤 사람으로 사는 게 더욱 값지다는 교훈을 진정 아흔아홉 살 이전에는 깨우치지 못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