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호<내포취재본부장>

지나온 우리 역사를 되짚어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관료나 권문세가 등 지배층의 부정부패가 국가의 쇠망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고려 말에 성행했던 분경(奔競)은 500년 고려 왕조를 몰락으로 치닫게 한 부패의 극단이었다. 권세를 거머쥔 고관대작의 집을 드나들며 뇌물을 바치고 대가로 벼슬을 얻는 것이 분경이다. 아무리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다 하더라도 관직에 나가려면 벼슬 높은 관리나 권문세가를 찾아가 뇌물을 바치고 청탁을 해야 가능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인재를 등용하는 공선(公選)은 유명무실하고 비선(秘選)이나 사선(私選)이 득세하니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뇌물로 출사한 무능한 관료들은 권문세가에게 바친 돈을 메우려 가렴주구를 일삼으니 백성들의 삶은 궁핍 그 자체였다. 지배층의 핍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게 되고 이는 곧 망국으로 이어졌다.

부정부패로 이반된 민심을 업고 새 나라를 건설한 조선 왕조도 멸망한 고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기에는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부패척결 의지를 드높였지만 후반기로 가면서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결국에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됐다. 조선은 건국 초기 분경금지법을 제정해 관료사회에 뿌리박힌 부패를 뽑아내려 했다. 부정이 일어날 수 있는 만남 자체를 원초적으로 금지시켜 부패의 싹이 커나가지 않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하급 관리에게 고관대작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하게 하고 사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사사로운 만남을 갖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를 어긴 관리는 귀양을 보내거나 파직시키는 등 엄벌에 처했다. 분경 금지와 함께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한 관리는 장오죄(贓汚罪)로 엄격하게 다스렸다. 뇌물이나 횡령 등 부패한 관리의 명단을 따로 기록해 본인은 물론 아들과 손자 등 3대에 걸쳐 벼슬에 나가는 길을 차단시켰다.

하지만 건국 초기의 반부패 의지는 시간이 갈수록 사그러들어 후반기에는 관료사회의 부정부패가 도를 넘어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돈으로 관직을 사는 매관매직이 횡행했고 공신이나 권문세가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더 좋은 관직을 얻는 구악이 재등장했다. 돈으로 관직을 사고팔다 보니 수령의 재임기간이 3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어떤 고을은 1년에 5번이나 수령이 바뀌는 곳도 있었다. 뇌물로 관직을 꿰찬 관료들은 축난 주머니를 채우려 백성들의 고혈을 짰고 심지어 관청에 지급된 무기마저 고철로 내다파는 일도 벌어졌다. 고려 말의 혼탁한 사회와 판박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관료들은 사불삼거(四不三拒)의 청백리 정신을 가다듬으며 청렴한 관료사회를 지켜 나가려 했지만 이미 부정과 부패로 물들어 버린 나라를 망국의 늪에서 건져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한 달 후인 다음 달 28일 시행된다. 우여곡절 속에 시행되는 ‘김영란법’은 부패 없는 나라, 바르고 경쟁력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출발선이다. 부패를 도려내려 물리적 수단까지 동원해야 하는 우리 사회가 부끄럽기는 하지만 청렴한 국가와 국민들이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무슨 방법이나 어떤 출혈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세력들의 저항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일부에서는 농업인이나 경제인 등을 앞세워 법 취지를 희석시키려는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역사에서 보듯이 관이나 지도층이 부패한 사회는 절대 국민들에게 편안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이는 깨끗한 관료사회가 안정된 국가를 만드는 초석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참에 관행이나 관습이란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해져 오던 부도덕한 문화가 말끔히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고로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이다.

이석호<내포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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