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 병수발 13년 효부 박천신씨

자고로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병수발에 심신은 지치고, 가산은 곶감 빼먹듯 기울어 피붙이 간 분란이 일어나기 십상인 것이 서글프지만 인지상정이다. 천륜에 생체기를 내는 우환에 당당히 맞서 병든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했다면 그래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제 부모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요즘 세태에선 박물관에나 전시될 만한 유물감이다. 대전시 서구 갈마동의 소문난 효부(孝婦) 박천신(58) 씨에게서 회한이 버무려진 시아버지 병수발 13년의 사연을 들어봤다.#. 그땐 힘들다는 푸념도 사치였다며느리 인터뷰에 시어머니 송헌예(85) 할머니가 연신 말을 거든다.“내가 변하면 변했지. 이 사람(천신 씨)은 안 변해. 우리 며느리가 욕봤지. 그 모진 세월 다 견디고. 아무개 며느리라 하면 이 근방에선 효부로 유명해. 내 며느리지만 이런 사람 없어요.”며느리 자랑하는 시어머니의 낯빛이 해맑다. 작고한 시아버지에 대해 입을 떼자마자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간경화셨어요. 원체 술을 좋아하셨거든요. 조금 호전되시면 또 술을 찾으시고 악화돼 다시 병원 신세를 지시고 그렇게 13년을 보냈습니다.”혹여 누가 될까 머뭇거리는 며느리를 대신해 송 할머니 나지막이 하신다는 말씀이 “그 양반 성격 참 괴팍했어. 식구들을 정말 힘들게 했으니.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그 비위 다 맞춰 가는 날까지 보살핀 게 우리 며느리야.”곡기는 별 관심 없이 안주삼아 홍어찜 몇 점, 구운 조기 몇 점, 푹 곤 명태 몇 점을 드시던 시아버지였다.술을 내오라고 호통 치면 몰래 미음을 쒀 막걸리에 타거나, 드링크제를 주전자에 담아 소주라고 내드렸다.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술 맛을 느끼지 못할 만큼 시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됐다. 미음 탄 막걸리도, 누런 드링크제도 그 땐 술로 아시고 들이키셨다. 그리곤 복수가 차고 혼자서는 걷지도 못한 상황으로 전이됐다.“잠시라도 옆에 누가 없으면 사달이 났어요. 아마도 신병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식구들 모두 밖으로 쫓아내기 일쑤셨어요.”병환 중인 시아버지 간병에 조카들 건사까지 시댁식구 수발을 드는데 받친 청춘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땐 잠자리에 들 때가 제일 행복했고, 힘들다는 푸념조차 사치였다고 회상한다. 두 번이나 열사의 땅으로 돈벌이를 나간 남편의 빈자리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청춘은 퍽퍽했다.먼저 가신 당신 남편, 밥상을 엎거나 애먼 사람 잡는 일이 허다했다는 송 할머니의 귀띔이 착한 며느리의 13년 간 마음고생을 짐작케 했다.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시아버지 당신 곁에 두고 하신 말씀 “너 욕보는 거 다 안다.” 그 한마디에 가슴이 녹아내렸다는 천신 씨. 언젠가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갈 만큼 힘겨운 일에 처했을 때 꿈속에 나타난 시아버지는 그를 어루만지며 “괜찮아 질게다” 위로를 해주신 곤 이내 사라지셨다고 한다. 유별난 시아버지 병수발이 어찌나 극진했던지 동네 사람들이 자청해 효부상을 줬다.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다고 지금도 손사래 치는 그는 진짜 효부다.#. 고부(姑婦)가 아니라 모녀지간이다 서로 기대 모진 세월을 견뎌온 시어머니와 며느리라 그런지 여느 고부지간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지금까지도 목욕탕에 늘 함께 간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미안하고 고맙단다. 송구스러운 쪽은 며느리다. 그리 팍팍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성실하고 착하디착한 부군이 사기를 당하며 시름에 잠겼다. 노인들 간병에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 3년 전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목욕시키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되뇌며 울컥하기 일쑤다. 시어머니와 구순을 넘긴 친정어머니 생각에 생목이 아파서다. 바깥일을 하고 있지만 점심 끼니때마다 집에 들러 시어머니 식사를 챙기는데 타고난 효성은 그 정도로 부모 봉양했다고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시)어머니께 죄송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거든요. 옆에서 항상 보살펴드려야 하는데…….”총기가 부쩍 흐려지시는 시어머니를 뵈며 억장이 무너진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하나 둘씩 잊혀져가는 세상이 야속하다. 사실 환갑을 바라보는 그의 건강도 썩 좋지 못하다. 몸 속 여기저기서 적신호를 보내오지만 내 몸 챙기는 데는 익숙지 않은 그다.#. 부모 섬김은 당연할 일효자 밑에 효자 난다고 했다. 어른들 모시느라 신경을 쓰지 못한 1남 2녀의 자식들이 천신 씨에게는 희망이다. 그의 말마따나 하늘이 준 선물들은 엄마의 품이 소홀했어도 반듯하게 자라줬다. 할머니 말씀이 부모에게 그렇게 잘 한단다.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항상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위로해주는 남편도 그를 지탱해준 힘이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싶은 것이 그의 소박한 소망이다.“친정어머니는 오빠가 모시지만 저에게도 어머니입니다. 제가 충분히 경험해본 바로는 따로 살면 손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깝게도 마음만 있을 뿐 여건이 허락지 않네요.”효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게 맞는 모양이다.“부모님 섬김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항상 부족해서 문젭니다.”효도란 무엇이냐는 우문이 부끄러웠다. 며느리 잘 얻어 편안하게 산다는 송 할머니의 칭찬이 아린 무엇인가로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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