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총괄국장

식당에서 불청객 파리를 만나면 반응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십중팔구는 유사하다. 밥상의 불청객 파리를 향해 손을 휘휘 저어 파리를 쫓는 아주 점잖은 몸짓, ‘식당 파리 쫓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파리는 다른 밥상으로 몸을 날리고,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반응이 나온다. 이런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대응에 여유만만한 파리는 이곳저곳을 유람하듯 시식을 하게 되고, 결국 식당 안 모든 음식을 골고루 맛보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식당 파리 쫓기는 어찌보면 불가피한 구석이 있다. 식탐 가득한 파리의 도발이 눈엣가시지만 적극적으로 일어나서 파리를 잡으려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리고, 음식 위에 앉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날쌘 파리를 꼭 잡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인지 식당에서는 누구도 그런 파리 쫓기를 소극적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설령 옆 테이블에서 쫓은 파리가 내 밥상으로 날아와도 얼굴 붉히지 않고, 모두 그렇게 휘휘 손을 저어 쫓는 것만으로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나만 아니면 그만이고, 굳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손쉬운 대처, 이 파리 쫓기식 적당주의가 사회에 만연, 곳곳에서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으니 문제다.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금융기관에 대한 당국의 소극적 방임적 자세는 물론 폭력배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다 나락으로 떨어진 경찰의 공권력은 바로 이런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다. 외환위기와 더불어 파산위험에 직면했을 때 천문학적 금액의 공적자금을 수혈 받아 살아남은 곳이 지금 대다수의 금융기관이다. 그런데도 금융기관은 각양각색의 수수료를 국민에게 부담지우며 가만히 앉아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수수료에 힘겨워하는 국민의 자자한 원성 따위는 이런저런 핑계로 애써 외면해왔다.

그러면서도 고액의 연봉에다, 수익만 남으면 배당을 하면서 돈 잔치를 벌이는 금융기관에 대해 마치 파리 쫓듯 금융당국은 아주 관대한 자세로 대응해왔다. 수많은 국민을 울게 만든 저축은행 사태도 금융당국의 부실한 관리감독에서 비롯된 것임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사회의 큰 불만요인으로 지적돼 오면서도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다가 급기야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는 중소상인들의 대규모 집단행동으로 불거진 신용카드 수수료 사태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카드 이용률 제고의 일등공신은 정부였다. 그래서 이용 증가에 따른 카드사의 수익 확대가 충분히 예견됐음에도 불구, 카드 수수료율을 합리적으로 인하하는 노력을 병행했어야 했지만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당국의 이런 느슨하고도, 무책임한 관리 덕택에 금융기관은 파리가 갖은 음식에 배를 불리듯 아무런 불편 없이 호의호식(好衣好食)할 수 있었다.

사회의 싸늘한 시선이 서릿발처럼 차갑고, 결집된 목소리가 정권을 뒤흔들자 이에 움찔한 당국, 은행, 카드회사 등이 뒤늦게 각종 수수료를 현실화하는 등 분위기 반전에 애쓰고 있지만 사회 불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는 양상이다.

경찰이 멀뚱멀뚱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조폭들이 패싸움을 벌이며 칼부림을 하고, 경찰청장이 보고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대창피를 당하자 경찰이 뒷북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조폭이 있는지 몰라서, 이들이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를 몰라서, 이들을 잡아들일 능력이 없어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인가 묻고 싶다.

지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는 듯 내버려두거나, 손을 젓는 정도로 의무를 다하려 하는 공복(公僕)의 파리 쫓기식 적당주의 아래서 국민의 멍든 가슴은 푸른 바다를 이뤄 넘쳐흐르고, 사회는 병들어 썩어 문드러진다.

식당에서 밥 먹을 때나 손을 젓고 마는 소극적 자세가 면책되는 것이지, 일상에서 절대 그럴 까닭이 없다. 귀찮게 구는 파리 따위는 벌떡 일어나 때려잡는 매사 적극적인 공복의 자세가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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