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본사총괄국장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예리한 창과,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강한 방패를 함께 팔다가 ‘그 창으로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상인의 이야기 ‘모순(矛盾)’

이 모순의 의미를 곱씹으며 조용히 우문(愚問)을 던져 본다. ‘만약 상인이 질문에 순순히 응해 창으로 방패를 찌르며 어느 것이 강한지를 시험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둘 중 하나는 뚫리거나 부러져 더욱 강한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열은 가릴 수 있으되 겨루는 순간 서로에게 다가올 비참한 결과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창이 이기더라도 창의 끝은 꺾이거나 두루뭉술하게 변해 창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패가 승리하더라도 강력한 창에게 입은 손상으로 인해 더 이상 방패 구실을 할 수 없게 망가질 수도 있다.

최근 교육계는 교권(敎權)과 학생 인권(人權)을 둘러싼 첨예한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서로에 대한 수많은 변론과 주장, 지지가 제법 강렬하고, 극단적이어서 마치 모(矛)와 순(盾)을 겨루어 그 결과를 확인해 보려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모순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함께 존재할 수 없듯, 양립(兩立)하지 못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교권과 학생 인권은 상대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모순일 수는 없고, 모순이어서도 안 된다.

학생의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일부 지역을 시작으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인권조례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끊임없이 교권은 학생과 학부모 등에 의해 쉽게 유린되고 있는 양상이다. 제자에게 거부당하기 일쑤인 스승의 초라한 위상에다 제자와 학부모에게 구타를 당한 스승의 상흔(傷痕)까지 접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교육의 미래는 없다’는 극단적인 예단(豫斷)마저 쏟아져 나온다.

바로선 교권은 참교육, 나아가 국가 미래를 위한 필수 자양분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권확립은 누누이 강조되고, 또 강조돼 왔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에서부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금언에 이르기까지 교권은 존경과 보호를 받아왔고, ‘교권확립’ 주장 앞에 모두 동의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과도한 체벌 등 학생 인권이 무시당하는 부작용이 동반되긴 했으나 선진국 대한민국의 오늘은 이러한 교육여건이 일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우리 사회에 투영되는 암울한 교육현장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학생 인권도 이제는 보살펴야 할 때가 온 것은 분명하다. 학생인권은 인권조례가 올해 처음 생겨나는 등 걸음마 단계이다. 교권확립의 구호 아래 짐짓 방기했던 학생들의 인권에 눈을 돌려보는 계기를 이제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교실붕괴 현상의 원인을 모두 학생인권조례에서 찾고자 하고, 인권조례 폐지와 체벌의 회귀만이 유린되는 교권 회복의 지름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다.

교권과 학생인권은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성장해야 한다. 교권과 학생인권을 향한 뜨거운 지지의 목소리도 지향점은 결국 한 곳이다. 국가를 위한 심신 건강한 동량지재(棟梁之材)의 양성을 강력히 희망하는 교육 차원의 고언(苦言)들이 단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의 입장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의 입장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두 가지 모두를 바로 세우려는 결의를 다져야 한다.

모두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하심(下心)’으로 교권과 학생인권의 건전한 양립에 머리를 맞대어야만 파국의 결과를 확인하려는 듯 독존(獨尊)만을 강변하며, 마주 보며 달리는 오늘의 교육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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