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군은 충남에서도 가장 조용한 지역이었다. 엄청난 관광지도 없고, 대단한 특산물도 없고, 걸출한 인물도 없지만 평범한 삶을 누리는데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인구나 산업을 비롯한 각종 지표가 충남에서 중간 그룹인 아주 평범한 군으로 지역민들의 성향도 온순해 텃새가 없는 곳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동서남북에 대전과 천안, 청주와 공주라는 충청권 굵직한 도시들로 둘러싸여 있어 직간접으로 피해를 보는 일도 많았지만 일일이 대처하지 않았다. 그만큼 부러울 것도 부족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평화롭고 조용한 이 지역이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 연기군 절반이 신행정수도 예정지로 발표되면서부터다. 이곳 지역민 중 누구도 연기군 일대에 행정수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지만 정부는 연기군 남부 일대를 행정수도 후보지로 확정 발표했다. 수백 년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이 행정수도로 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지역민들은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래도 국가의 백년대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생각하고 순순히 삶의 터전을 내주었다.
그런데 2007년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이 제출되고, 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리면서 연기 군민들의 험난한 여정은 시작됐다. 집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던 주민들은 연일 촛불을 들고 조치원역 앞으로 모여들었고, 삭발도 서슴지 않으며 격렬한 항거를 시작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오가며 수 없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신행정수도 대책을 위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 행정수도는 행정도시란 이름으로 재추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005년 또다시 행정도시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이 제출됐고, 각하 결정이 될 때까지 싸움은 이어졌다. 다시 또 그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수정안을 제시하며 행정도시를 기업도시로 만들겠다는 안이 발표되자 지역민들은 다시금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 없던 주민들은 다시 분연히 일어나 수정안과 맞서 2년을 싸워 원안 사수를 이끌어 냈다. 지긋지긋한 대정부 투쟁은 그제야 막을 내렸다.
자그마치 10년 가까운 세월을 투쟁 속에 보내야 했다. 생업을 뒷전으로 한 채 조치원역 광장에 모인 것이 수십 차례다. 혹독한 투쟁의 10년을 보내며 온순하기만 했던 연기지역 주민들은 어느덧 싸움닭이 돼버렸다. 지역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였던 조치원역 광장은 투쟁의 성지가 됐다. 삭발하고, 단식하고, 촛불을 들고 외치는 일에 익숙해진 연기 군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화와 타협이라는 쉬운 길을 외면하고 웬만한 일은 싸우고 소송을 통해 시비를 가리려는 습성을 갖게 됐다. 최근에는 국회를 상대로 선거구 분리 독립 쟁취를 위한 싸움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끝이려니 싶었지만 싸울 일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지금껏 무엇 하나 쉽게 상식선에서 처리된 일이 없다보니 ‘울어야 젖을 준다’는 의식이 주민들 사이에 깊이 박혀버렸다. 대외적인 싸움에 익숙해진 주민들은 심지어 내부 토론과 양보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일도 법과 투쟁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성향까지 생겨났다. 세종시 신청사 건립지를 놓고 계속되고 있는 주민들 간의 의견충돌은 대화를 시도하기에 앞서 물고 뜯는 형국으로 번져가고 있다. 전동면 일대 철도시험선로가 구축된다고 발표하자 삽시간에 능숙하게 대책위를 만들고 투쟁모드에 돌입하는 것도 싸움에 익숙해진 탓이다.
외지에서 누가 와서 정착해도 텃새가 없는 것으로 알려질 만큼 순박했던 연기 지역민들이 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싸움닭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기 주민들을 지켜보며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학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세종시 출범이 임박하며 예정지역은 빠르게 도시화된 모습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쾌적하고 아름답고 편한 도시를 만들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제공한다니 싸움에 지친 지역민들에게 어느 정도 보상이 될까 싶은 기대가 앞선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깊이 박힌 상처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병은 언제, 누가, 어떻게 보상하고 치유해줄 것인지는 누구도 답을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