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이팔청춘 언저리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가 꼬리를 물고 타전됐다. ‘자살공화국’의 자화상으로 치부하기엔 가슴이 너무 먹먹하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똬리를 틀었기에, 얼마나 많은 한(恨)이 서렸기에 그토록 모진 선택을 했을까. 생때같은 자식 잃고 넋을 놓았을 부모의 심정은 또 얼마나 찢기고 해졌을까. 여리고 감수성 예민한 또래들은 친구의 죽음을 무엇으로 기억할까. 못다 핀 영혼들이 저 세상에서라도 평온한 안식을 찾길 그저 바랄 뿐이다.
성적 때문에, 괴롭힘 때문에, 신변을 비관해서,……. 이런 저런 사연이 빌미가 돼 꽃잎이 하나 둘 질 때 우리 중 일부는 요즘 아이들의 나약함을 지적하며 대수롭잖게 여기거나 그저 남의 불행으로 취급하며 강 건너 불구경을 했다. 사회라는 울타리는 그렇게 부실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 했다. 조금 더 견디고 의젓하게 대처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움이 물밀 듯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고통의 크기는 조금 무디게 고비를 넘긴 누군가의 경험을 잣대삼아 재단할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막다른 선택이 아니라 몸서리쳐지는 현실로부터의 탈출구라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짐작 말이다.
우리 어른들이, 우리 사회가 미처 덜 여문 아이들에게 결코 옳은 판단이 아니라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고 알려주고 손을 내밀어줬어야 한다. 세상 풍파 겪는 법을 스스로 깨닫게끔 인도해 줬어야 한다. 과연 비상구에 선 위기의 아이들이 두드릴 문이 어디에 몇 개나 있고 얼마나 잘 가동되는지 신경 써야 했다.
연이어 터진 황망한 사건에 ‘요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저절로 혀를 차게 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맺음은 되바라짐에 대한 한 걱정이다. 힘없는 아이들을 집단으로 따돌리는 비겁함, 인정사정 보지 않고 일삼는 폭력과 폭언과 협박,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누군가를 서슴없이 험담하고 음해하는 용렬함 등이 그렇다. 예전에도 힘깨나 쓰는 아이들은 있었다. 삼삼오오 몰려다지며 ‘껌 좀 씹는’ 아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분명 지금 아이들과는 행동 양태가 달랐다. 빼앗고 괴롭히고 손가락질 하는 수준이 달랐다.
사회 초년병 시절 한 여름 낮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신호 대기 중 차창 밖으로 보였던 두 소년의 뒷모습. 몸이 불편한 친구의 책가방을 대신 매고, 마저 한 쪽 어깨를 내준 채 나란히 걷던 소년들의 뒷모습이 배려와 이타가 그리울 때면 저절로 떠오르곤 한다.
일부이기는 하나 갈수록 되바라지는 아이들의 코드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책도 무용지물 되기 십상이다. 가해자를 양산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고 효과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학업 성적이 최우선시 되는 사회, 오냐 오냐 자라 컴퓨터하고 놀도록 훈육된 사회, 남의 불편보다 내 편의를 강조하는 사회는 약자를 배려하는 데 인색하다. 더불어 사는 데 야박하다.
사회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부터 따져볼 일이다.
내 아이가, 우리 아이가 피해를 입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바른 인성을 심어주는 데 조바심을 내는 게 마땅하다.
곳곳에서 뇌관이 터진 후에야 상황이 어떻고, 본질이 어떻고, 대책이 어떻고 허둥지둥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이제라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처방전을 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만큼은 냄비근성이 발동하지 않길 바란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데 끈기를 갖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내 아이 문제라고 받아들이면 길은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