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총괄국장

모친이 발목이 부러지는 바람에 수술을 받고, 병상 신세를 지게 됐다. 고통과 불편을 호소하며, 병원비 등 이런 저런 걱정거리가 더해 심신이 고달픈 어머니가 안타까워 아들은 의사에게 언제쯤 다 낳겠는지, 입원은 며칠이나 해야 하는지,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게 됐다.

그러나 담당 의사는 아들로서, 보호자로서의 각별한 심정을 외면한 채 엉뚱한 답변을 던졌다. ‘언제쯤 다 낳겠는가?’에 대해서는 ‘봐야 알죠.’였고, ‘며칠 동안 입원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것도 봐야 알죠.’였다. 이후 잠시 정적이 흘렀고, 돌아서는 아들의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지난해 어느 병원의 소통(疏通) 단절 현장이다. 어떻게 보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완치’라는 것이 병세의 정도와 각종 변수에 따라 들쭉날쭉해 상태를 봐가면서 말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봐야 알죠’ 는 정답일 수 있다. 또 입원 일수도 병세의 호전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이 또한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와 보호자의 이 대화는 보기에는 보호자가 우문을 던진 것이고, 의사는 현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환자 및 보호자와 소통할 의무를 지닌 의사가 소통을 할 의사(意思)가 없다는 데서 문제는 비롯된다. 병원에서 수준 높은 의술과 정성을 다한 진료는 당연한 것이며,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진료 이외의 관심과 배려 또한 병원의 몫이다. 따라서 소통에 관심 없는 의사가 빚어낸 무산된 소통은 고객 불만으로 이어지고, 고객 만족에 실패한 병원은 고객을 잃게 된다.

무릇 소통은 상대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되며, 이해는 대화를 통해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고, 교감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대화 의지 상실로 소통이 단절되면서, 대화가 절실한 상대 사이에 철옹성 같은 단절의 벽이 들어서고, 대개는 이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사회 계층 간, 심지어 가족 간의 소통에 이르기까지, 소통부재가 생산하는 사회의 갖은 부작용은 지칠 줄 모르고 넘쳐흐른다.

소통이 만능의 요술방망이일 수는 없겠으나 소통은 나와 남이 서로 공감하고, 동질성을 공유하게 되는 매개인 동시에 언제든 상대와 빚어질 수 있는 갈등, 그 갈등으로 인한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고, 또 최소화할 수 있는 최상의 필요조건이다.

그래서 유기적 사회 구조 아래서 누구나 안게 되는 크고 작은 소통의 의무는 기꺼이 수용해 행동하느냐, 외면하고 애써 망각하려 드느냐의 선택에 따라 안게 되는 결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상대에 대한 적극적인 소통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이자 사명인 사람들조차 소통의 자세가 부족하고, 쉽게 그 의무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공복(公僕)으로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소임에 전념해야 하는 공직자의 의무가 망각되고, 외면된다면 공직자는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 국정이 국민과 소통에 무관심해지는 순간 정치의 목표가 더 이상 국민을 지향하지 않게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행정은 어쩌면 국민에게는 무의미하다.

최근 모두의 안타까움을 샀던 경기도 수원의 여성 토막 살인 사건 또한 경찰의 소통에 대한 자세 부족이 문제였다. 긴급한 상황에서 공권력의 도움이 절실한 민원인과 제보자와의 소통은 의무이자 사명이 아닐 수 없으나 의무에 소홀, 결국 회복하기 힘든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뿐인가. 각종 대책에도 불구, 자살 등 부작용이 끊이지 않는 학교폭력도 그들과의 소통에서 답을 찾아야 하며, 뜬금없이 등장한 지방행정체제 개편 논란도 문제는 소통이다. 기초자치단체의 폐지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차치하고서라도 서울은 되고, 지방은 안 된다는 식의 개편 논의는 도무지 소통은 고민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을 피하려고 엉뚱하게 애쓰지 말고 제발 소통 좀 하세요. 그 끝은 분명히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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