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겨울 첫 공연 무대도 객석도 눈물바다

도도한 클라리넷의 선율을 타고 당돌한 트럼펫이 박자를 맞춘다. 호른이 뱉은 긴 호흡을 색소폰이 받아 제 음색을 입히니 곱디고운 화음이 빚어진다. 자로 잰 앙상블은 아니다. 음악에 문외한이 아니라면 어딘가 약간 어설프다는 비평을 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앙코르를 받는다. 그들이 들려주는 무대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동이다. 단원의 2/3 이상이 장애우들인 충남관악단 ‘희망울림’. 그 천상의 하모니는 칠순을 넘긴 감독 겸 지휘자 노덕일 씨의 역작이다. 차고 넘치게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면서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말하는 충청 관악(管樂)의 바이블을 만나봤다.#1. 음악으로 사회를 치료하다희망울림의 첫 공연이 열린 2005년 12월 7일. 피날레를 마친 순간, 무대도, 객석도 눈물바다가 됐다.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터득한 단원들의 눈물과 내 자식, 내 형제가 해냈다는 감격의 눈물이 뒤섞인 감동의 도가니였다.“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무대였어요. 좌충우돌 11개월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더군요. 중학교 교장 출신의 한 어머니는 ‘내 자식이 음악을 좋아하는지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교육자로서 자질을 탓하며 대성통곡 합디다.”희망울림은 심대평 전 충남지사가 구상했다. 일본 출장길에 장애우들로 구성된 현지 관악단의 공연을 보곤 대뜸 “이것이 복지다”라며 충남에도 같은 콘셉트의 악단을 만들자고 제안 했단다. 당연히 반응은 싸늘했다. 비장애인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장르인데 지체장애우와 지적장애우들로 악단을 꾸린다는 것은 모험을 넘어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라고 만류만 난무했다. 그때 적임자로 낙점된 이가 관악의 대부, 노 감독이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으나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긍정적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 제 성격이거든요. 곧장 충남남부장애인복지관을 통해 단원 모집에 들어갔습니다. 한 30명 정도 추렸는데 순간 내가 실수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나마 악기를 손수 들 수 있는 사람들로 10명을 선발했죠.”생짜배기들은 3개월이 지나도록 ‘도’소리도 내지 못했다. 체념이 임박한 순간, 언어 장애가 있는 한 단원이 옆 동료를 향해 옹알이를 했다. 내용인즉 음이 틀렸다는 지적이었다. “귀가 뚫린 거예요. 기적 같은 일이죠. 그때부터 악보를 보고 기초부터 터득해 나갔습니다. 단원선발에서 첫 정기연주회까지 11개월간 우리는 그렇게 한 몸이 됐습니다.”연탄가스 질식의 후유증으로 사지 신경이 부분 마비된 사람,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으로 살다 1년 만에 새 생명을 얻은 사람, 자폐아…, 그렇게 모인 열 명은 입소문을 타고 스무 명을 넘어섰다. 현재 35명의 단원 중 스물 서너 명이 장애우들이다. 첫 공연 후 4년여 동안 40회가 넘는 초청 연주회를 가졌다. 공주치료감호소 공연 때의 일이다. 희망울림 공연 며칠 전 어엿한 교향악단의 위문공연이 있었는데 하품은 예사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시선이 고울 리 만무한 환경이었지만 기죽지 않았다.“‘부족한 사람들이 음악으로 여러분을 위로하러 왔다. 첫 곡을 듣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리를 떠나도 된다.’고 되레 선수 쳤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앙코르 세례가 이어지더군요. 단원들이 음악으로 자가 치료를 하고 그 음악으로 사회를 치료한 셈이죠.”산골 학교도, 사회복지시설도 희망울림의 팬들이다. 장애우들을 제외한 단원들은 악기를 들어주고 악보를 펴주는 복지사들이다. 희망울림은 그렇게 세상을 향해 어울림의 하모니를 들려주고 있다. #2. 관악의 바이블희망울림 감독 겸 지휘자는 일부일 뿐이다. 현재 한국관악협회 회장, 대전페스티벌윈드오케스트라와 중구관악합주단 지휘자로 활동하며 식지 않는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음악을 빼고 그의 삶을 논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음악 애호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그 귀하다는 전축을 끼고 클래식에 심취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운명처럼 클라리넷과 만났고, 결국 그 인연으로 음대(클라리넷 전공)에 진학했다. 19년 10개월간의 공군교육사령부 군악대장을 거쳐 1980년 교편을 잡는다. 가수 아이비, 성악가 최정화, 대중음악 기획자 신지웅 등이 그가 발굴한 될성부른 떡잎들이다. 내년에 예편하는 현 공군군악대장(김학렬 중령)이 그의 제자일 만큼 세월을 거꾸로 돌려보면 그의 손을 탄 인재들은 헤아릴 수 없다. 지난해 4월 8일 연정국악문화회관대극장에서는 아주 특별한 무대가 펼쳐졌다. ‘노덕일 선생 고희(古稀)기념 음악회’, 가슴으로 길러낸 제자들이 마련한 공연에서 그는 지휘봉을 잡았다.“손사래를 쳤는데도 저 몰래 준비한 모양입디다. 마지못해 응하긴 했어도 참 가슴 벅찬 무대였어요. 아마 대한민국 나팔장이 중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겝니다.”무엇보다 일본 취주악협회와 35년 동안 교류를 하며 대전을 넘어 대한민국 관악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 음악을 통해 독도문제 등 한일 간 장벽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그는 평가받을 만하다.제자들 뿐만 아니라 여느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대한다. 싫은 소리를 하는 일도, 얼굴을 붉히는 일도 없다. 입버릇처럼 ‘오케이’라고 한다. 긍정의 힘이다.“내 인생이, 처한 현실이 고달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잘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살다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3. 삶이 아름다운 이유일평생 음악과 살아온 그가 서서히 은퇴를 준비 중이다. 그래도 건강이 허락되는 한 욕심을 부리고 싶은 일이 있다. 희망울림이 그것이다. “마치 나팔을 부는 것처럼 온 몸으로 가르치고 지휘를 해야 해요. 그들과 감정이입이 돼야 만이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봉사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제가 필요하거든요.”그의 왕성한 음악활동은 대게 봉사로 이어진다. 다시 태어나도 음악을 하는 봉사자로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집 사람하고 약속했어요. 죽으면 시신을 기증하자고. 아마 그것이 마지막 봉사가 되겠지요.”인터뷰를 마친 그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이날(7월 21일)은 희망울림이 한국철도공사의 초청을 받았다. 35인의 연주자들이 장인의 손끝을 따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수의 선율을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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