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장
2009년 10월 29일 새벽 4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로 아프가니스탄 미군 전사자의 유해를 마중 나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현충일을 10여일 앞둔 지난 5월 25일 서울 공항에서 12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를 맞이했다. 6.25 전쟁이후 처음으로 국군의 유해가 송환된 역사적인 날이다. 송환된 유해는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 등에서 전사한 군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국군으로 입대해 미군 카투사 소속으로 전투 중 전사했다. 이번에 돌아온 전사자 유해는 국군으로 한국에 돌아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미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송환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남과 북은 유해 발굴 및 송환 협약을 체결하지 못해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한 번도 전사자 유해를 돌려받은 적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한 병사가 60년 만에 고향에 묻혔다. 이 병사는 일리노이주 출신으로 서울 인근에서 포로가 된 뒤 사망한 것으로 파악돼 미 국방부가 유해 찾기에 나섰다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고도 미 국방부와 유족은 유해 찾기를 계속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가족들은 사망해 생존한 누나에게 유해를 인계했고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6.25 전쟁이후 처음으로 유해 12구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을 계기로 유해 찾기에 나선 유가족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유해 확인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는 유족이 송환이전 하루 10여 명에서 최근에는 30여 명까지 늘었다고 한다. 북한지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 유해 찾기를 포기했던 유족들의 문의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북한에서 돌아온 유해를 보고 유족들이 나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과거 많은 유가족들은 유해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해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지 않았고 문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희망이 생긴 것이다. 유족들은 전사한 가족을 가슴에 묻었다. 그래서 언제나 아픈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상처다.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국가는 이들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한다. 유해를 돌려줘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매년 막대한 예산을 들여 한국전쟁을 비롯한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등에서 전사한 미군유해를 송환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고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미 의회도 매년 전사한 병사 200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미국은 유해 발굴과 송환을 위해 북한과도 미군 유해 발굴 사업 협약을 체결하고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다. 발굴하지 못한 6.25 전쟁 전사자는 13만여 구이며 이 중 6492구의 유해만 수습했다. DNA 시료 채취는 1만 9000여 건에 달하고 있고 신원이 확인되는 건수도 해마다 늘고 있기는 하지만 갈 길이 멀다.
현재의 조직과 예산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어렵다.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는데 좀 더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될 수 있도록 예산을 배려해야한다. 또 미국처럼 북한과 유해 발굴 협약이라도 체결해 발굴에 나서는 등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충일 기념식에서 6.25 전쟁이후 처음으로 국군의 유해가 송환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분들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정부는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아직도 북녘 땅에 묻혀 있는 수많은 호국용사들의 넋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며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일 중 하나가 바로 이분들의 유해를 찾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의지가 예산편성 등으로 이어져 활발한 발굴로 현실화되길 희망한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홈페이지에는 ‘나라를 위한 고귀한 헌신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