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이다. 희로애락 부침의 연속인 우리네 인생이 꼭 그렇다. 아등바등 수 십 년 삶의 끄트머리에 서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진리를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것이 이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모진 선택이 유행병처럼 번진다. 불행의 불구덩이 속에서 악다구니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좌절과 실의다. 신은 견딜 만큼만 시련을 준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생이 힘겨워도 내일의 태양은 뜬다. 웬 장광설(長廣舌) 타령인지 궁금하다면 이 사람을 소개한다. 한 때 잘나가던 기업 총수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가진 재화 모두 잃고 뒤안길을 걷고 있는 사람, 그러나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종완(77) 전 영진건설 회장. 취봉목공예사(翠峯木工藝舍) 주인장 그의 행복예찬을 들어보자. #1. 요즘 어떠십니까?코끝에 은은한 향이 내려앉았다. 8년 전 인터뷰 당시(2002년) 모습보다 되레 더 젊어지고 평온한 얼굴로 맞아준 주인장을 닮았다.“이게 편백나무랍니다. 향이 좋죠? 피톤치드를 발산해요. 그러니 베갯속으로 그만이죠.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건 쌀뒤주예요. 손가락물림 기법이라고 해서 못을 사용하지 않죠. 일본에는 편백나무로 만든 제품이 무궁무진해요. 책걸상에 침대며 아이들 장난감, 심지어 화장품, 음료수에까지 첨가됩니다. 가끔 작업을 하다보면 숲속에 사는 느낌입니다.”4-5년 전 소일삼아 기초과정부터 전문가과정 목공예를 연마했단다. 사랑방을 겸해 공예사 문을 열었고 편백나무 효능에 빠져 그 재료로 베갯속과 쌀뒤주를 만들고 있다. 컴퓨터를 배우고 공방을 만들고 인생은 70부터라고 하더니 요즘 그의 근황에서 청춘의 열정이 읽혀진다.“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좀 있었어요. 적성에 잘 맞으니 이만하면 제격입니다.”#.2 ‘네 안에 행복있다’그처럼 바쁘게 산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1995년 부도로 문을 닫을 때까지 ‘영진건설’은 충청권을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앞만 보고 달렸다. 승승장구를 해코지할 그 무엇도 없어 보였다. 대전시가 분리되기 전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 충남기관장회장을 맡았을 정도다. 돈도, 명예도 지위도 그의 주변을 자석처럼 붙어 다녔다. 그땐 그 영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성취를 갈구했고 그 쾌감은 영원할 줄 알았다.“제 기억으로는 그럴싸한 감투만 서른 여 개는 됐었던 것 같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돈도, 명예도, 지위도 결코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요. 지인들과 허심탄회하게 어울리며, 내가 하고 싶은 일 방해받지 않고, 무엇보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사업 실패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면 세상을 원망하고 살았을 겁니다. 아니 살 가치를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지난달 23일 아주 특별한 나들이에 나섰다. 공식 행사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모교인 충남대 취봉(翠峯)홀 리모델링 개관식에 참석한 것이다. 취봉은 그의 호다.20년 전 당시로서는 꽤 거액인 3000여 만 원을 들여 리모델링해 준 건물에 학교 측이 감사의 표시로 그렇게 명명했다. 그 건물의 2차 리모델링 개관식에 초대받아 테이프를 잘랐으니 감회는 남달랐을 터지만 되레 쑥스럽고 고마울 따름이었단다.개관식 직후 까마득한 후배들을 앞에 두고 십 수 년 만에 연단에 섰다.“‘국가와 사회, 가정도 흥망성쇠가 있다. 여러분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궂은 일 숱하게 맞닥뜨릴 텐데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난 망했어도 즐겁게 산다.’고 했습니다. 이게 제 진심입니다. 세상사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아요. 정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후유증을 털어내니 세상이 보입디다. 누구에게나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만하면 카운슬러로 손색없지 않겠습니까.”#3. 희수(喜壽)에서 바라본 세상“제 부도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전 죄인입니다. 공적인 자리를 마다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욕을 해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더 미안합니다.”그의 말마따나 실패한 사업가일지는 모르나 기업 총수로서의 그를 주변사람들은 베풀 줄 아는 호인으로 기억한다.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면 내 눈에 피눈물 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하도급 업체를 상대로 한 대형건설회사의 횡포를 보면서 지론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진다.“엎질러진 물이 됐지만 완벽한 시공이 영진건설의 모토였습니다. ‘나는 죽고, 언젠가 영진건설은 없어질 수도 있으나 우리가 시공한 건축물은 남는다.’고 누누이 강조했죠. 반추해보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도급업체는 상생의 파트너랍니다. 그들이 건강하게 존속돼야 원청업체도 건장한 법이거든요. 요즘 내로라하는 건설회사 하는 꼬락서니 보면 참 한심합니다.”남모르게 퍼주기로 유명했던 그다. 대전상공회의소 회장 시절, 집에 침입한 S대 재학생 강도의 딱한 사정을 듣고 며칠 뒤 흔쾌히 돈을 내주며 따끔하게 훈계한 에피소드는 그의 성정을 대변한다. 숱한 소년·소녀 가장들이 그의 보호막 아래 있었다.그가 조심스럽게 재기의 길을 타진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누군가로부터 사업을 함께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 나이에 새 인생을 설계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해 볼 요량입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소외된 사람들의 그늘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욕심은 내지 않을 겁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희수(喜壽)의 혜안이 더불어 사는 가치를 조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