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장

누군가 다소 상기된 억양으로 대관절 소통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상황이 체화된 답을 정해 놓고 동조해 주길 바라는 눈빛이 읽혀졌다. “글쎄요. 요즘처럼 자기주장에만 함몰돼 좀처럼 마음의 귀를 열지 않는 경우에는 대화 테이블에 앉아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소통이 아닌가 싶네요.” 왜 그토록 고깝게 대답했는지 자네 또한 한심하다.

공무원인 그 누군가는 “세상이 벽창호들로 넘치는 것 같다. 앞뒤 자르고 자신들이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무조건 ‘소통을 외면 한다’며 심지어 상종 못할 사람 취급하기 일쑤”라고 장탄식을 토했다.
어느 때인가부터 ‘소통’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화두가 됐다. 여기에 디지털이 SNS와 같은 용병들을 거느리고 위세를 떨치는 통에 마치 소통의 전성기가 도래한 착시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가난한 말이 홍수를 이루고 대화의 기술이 멸종된 시대가 소통 전성기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치는 말보다는 대거리에 능통하다. 권력을 위해선 같은 편끼리도 난장질을 마다하지 않으니 정치의 미덕인 대화와 타협 수준은 파리 날리는 장터 떨이 물건보다 후줄근하다.
집단 이기주의의 병폐를 보여주는 떼법은 갈수록 선한 사람들까지 현혹한다. 님비현상이 떼법을 만나면 약도 없다. ‘무조건 안 된다’며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귀를 닫아 놓은 악머구리들과 소통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 그래놓고 되레 상대방을 벽창호로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진짜 억울해 이 사회가 귀를 열어줘야 하거나 궤도를 이탈한 사회를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까지 ‘떼법’의 범주로 옭아매는 덫 행세를 하니 더 큰 문제다.

건전한 비판보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에 익숙한 문화도 소통의 질을 떨어뜨린다. 이런 부류의 상당수는 어떤 현안에 대해 살똥스럽게 버르집는 습관이 있다.
자기방어기제에 함몰돼 열 중 아홉 이상으로부터의 주의나 손가락질은 아랑곳없이 제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집단도 소통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모두 아집과 편견,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갇힌 프로크루스테스의 후예들 같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악명 높은 도둑이다.

신화에 따르면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그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와 쇠로 만든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여 죽이고 길면 잘라 버리는 방법으로 죽였다.
노상강도의 살인무대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인 셈인데 일단 부비트랩 같은 침대에 누우면 살아나올 방도가 없었으니 그릇된 아집 따위로 인한 횡포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듣도 보도 못했지만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이 저지르던 악행과 똑같은 수법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힘없는 나그네들에게 공포 자체였던 프로크루스테스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못된 ‘도둑놈의 DNA’가 도처로 유전되는 것까지는 막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저급한 아집 좀 부리고, 자기합리화만 내세우며 막무가내로 불통을 사수한다고 도둑놈의 후예로 몰아 붙이냐고 타박할지 모르나 얍삽한 심보가 용인의 금도를 넘어설 경우 사회의 저력마저 갉아먹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 사회의 질서는 설득커뮤니케이션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등과 충돌 앞에서 각자의 입장을 토로할 때 적어도 상식선의 여지는 남겨야 설득을 하고 설득을 당할 수 있다. 말로 천 냥 빚 갚는 모듬살이의 이치를 뭉개지 않으면 답은 보인다. 진실에는 모르쇠인 목청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은 뒤끝이 개운치 않은 법이다. 수 천 년 묵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제 부서질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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