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부장
직접 시청하지는 못했고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TV 코미디 프로에서 이런 내용의 대화가 오고갔다고 한다. 누군가 “왜 한국 학생들이 등산복을 입고 학교에 가느냐”고 물으니 상대가 “학교교육이 산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실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뼈 있는 대화이다. 수년 전부터 중고생들 사이에서 특정 브랜드 등산복이 대유행하면서 마치 교복처럼 모든 대부분의 학생들이 입고 등교하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동시에 지향점 없이 가고 있는 이 나라 교육문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등산복은 수년 전부터 학생들뿐 아니라 전 국민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등산복 제조 브랜드들이 삽시간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엄청난 마케팅 공세가 이어졌다. 화려한 디자인과 다채로운 기능을 부여한 등산복이 쏟아졌고 어디서나 쉽게 눈의 띄는 옷이 됐다. 모든 백화점에서 정장류 매출은 떨어졌지만 아웃도어 의류 매출이 크게 신장해 전체적인 의류 매출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득수준 향상과 주5일제(주 40시간근로제) 정착으로 레저인구가 급증한데다 제조사들이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쳐 수요는 급팽창했다.
등산복 유행의 이면에는 웃지 못 할 일들도 많다. 한국 의류업체가 이탈리아나 프랑스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정통한 외국 브랜드와 기술제휴를 통해 등산복을 생산하는 것처럼 위장해 판매하는 형태가 일반화 됐다. 한국이 세계적 패션의 종주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내 소비자들은 외국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이 같은 꼼수가 동원됐다. 동일 제품이 외국보다 터무니없이 비싸게 판매됐지만 비쌀수록 잘 팔리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교내 서열에 따라 등산복을 입는 등급이 매겨졌고, 힘없는 동료의 고가 등산복을 빼앗는 일도 빈번히 발생했다.
학생들이 등산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것이 학교교육이 산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라면 국민 대다수가 등산복을 입고 직장에 출근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이 나라(정치)가 산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산으로 간다’는 표현은 뭔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뚜렷한 목적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지금 이 나라 국민들은 과연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뭔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한국인은 무언가에 꽂히면(마음을 빼앗기면) 무섭게 빠져드는 특성을 갖고 있다. 세계 어떤 나라 국민도 흉내 내지 못할 집념과 집착을 발휘한다. 어떤 목표를 정해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무서운 근성이 있다. 그 근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구미 선진국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정치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금 모으기 등을 통해 외환위기를 단숨에 극복해내고 기름범벅이 된 서해바다를 온 국민이 합심해 살려내는 모습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력은 확인됐다.
문제는 이토록 무서운 저력을 가진 국민들에게 누구도 확실한 방향타를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 살아보세’를 구호로 내걸고 새마을 운동을 추진했을 때 온 국민은 가난 탈출을 위해 뼈가 부서져라 일을 했다. 그 덕에 정말로 잘 살게 됐다. 그러나 막상 잘 살게 된 이후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몰라 허둥대고 있다. 그야말로 산으로 가고 있다. 지금의 이 국민적 방황이 장기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우리 국민들에게 뚜렷한 의제와 목표를 제시할 역량 있는 지도자를 가려내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산으로 가고 있는 대한민국 호를 안전하게 대양으로 항해시킬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를 가려내야 한다. 국민적 방황의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시점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가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국민들을 잘 이끌고 갈지 신중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