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지 않은 충북. 보물처럼 숨어있는 이곳에서도 105년 전 서서히 독립을 향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역사 기록 등을 살펴보면 충북의 경우 아버지 홍범식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택한 홍명희를 비롯해 손병희·권동진·권병덕·신석구·신흥식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충북 전역에서 활동했다. 지역 최초의 3·1운동을 주도한 벽초(碧初) 홍명희와 의암(義菴) 손병희가 마주한 그날, 그 현장으로 들어가본다.
손병희 만난 홍명희 괴산서 첫 만세운동
청주 만세운동 터 만세·삼일공원 쫓아보니
5명의 민족대표, 횃불 그날의 함성 기억하고 있어
#1. 홍명희와 괴산장터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
1910년 경술년(庚戌年) 8월 29일. 이날 나 홍명희는 조국도, 아버지도 모두 잃었다. 일본 대성중학교를 다니던 나에게 전달된 갑작스러운 비보는 뱀처럼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가던 일제가 기어이 우리의 국권마저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산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어 오시던 아버지가 망국에 대한 설움과 치욕이 담긴 피맺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셨다는 것도. 아버지가 남긴 몇 장의 유서에 담긴 말은 곧 나의 가슴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슬픔에 채 잠길 새도 없었다. 망국노가 돼 버린 나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것 말고 무엇이 더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당장 상급학교로의 진학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유서에 따라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하기 위해 향한 경성에서 한봉수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데려갈 곳이 있다고 했다. 손병희의 집이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결연한 표정의 그는 “부탁할 뜻이 있네. 만세를 불러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줘야겠소”라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곧 있으면 괴산에서 장이 열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귀향한 나는 의거에 동참할 이들을 찾아나섰고 이재성과 홍용식, 서명규가 함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며칠 뒤 이재성은 300장의 독립선언서를 나에게 건넸다.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 수많은 군중이 모였고 우리는 목놓아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독립을 갈망하는 군중은 걷잡을 수 없이 늘었고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우리의 외침은 계속됐다.
#2. 청주 삼일·만세공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기록, 보존은 잊힐 위기에 놓인 역사에 다시금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처럼 충북 청주에는 3·1만세운동에 앞장선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장소가 곳곳에 존재한다. 청주 상당구에 위치한 삼일공원과 상당구 남주동 옛 우시장 만세공원이 대표적이다.
대전과 가까운 청주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탄진역 버스정류장에서 청주버스 407번을 타고 40여 분가량 이동하면 삼일공원 인근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공원으로는 우암산 기슭을 타고 10~15분 가량 걸어올라야 하는데 쌀쌀했던 공기가 누그러진 덕에 삼일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오르던 중 쾌청한 하늘 아래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보였고 5개의 동상과 횃불이 곧이어 눈에 들어왔다. 삼일공원에는 충북 첫 3·1만세운동인 괴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홍명희에게 만세운동을 주도해달라고 부탁한 의암 손병희를 비롯해 우당 권동진, 청암 권병덕, 동오 신홍식, 은재 신석구 등의 동상이 있다. 거대한 태극기 앞에 모여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날의 긴장감이 묻어났다. 민족의 혼이 깃든 삼일공원과 30~4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만세공원은 청주의 첫 만세운동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자그마한 만세공원 내에는 태극기와 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원을 지나던 한 백발의 어르신 A(85) 씨는 “나이 든 우리는 이곳에서 지나간 역사를 떠올려본다. 이런 살아있는 장소가 가진 힘은 크다. 요즘의 역사교육은 정치적인 갈등 속에 묻혀있는 듯해 참 아쉽다”라며 자리를 벗어났다.
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