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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3월의 함성 속으로] ③ 세종 전의장터 만세운동

2024. 03. 19 by 김지현 기자

세종에는 아담한 크기의 전의역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전의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는 크다. 각종 참고 문헌에 따르면 조선시대 당시 이곳을 중심으로 목천·천안·청주·연기 등으로 길이 뻗었다고 하니 1919년 충청권 3·1운동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전역과 전의역을 오가는 열차 횟수는 하루 6번 남짓. 오전 8시 전의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40분을 달려 도착한 전의역에서 17인의 애국지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날 그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본다. 

1905년 덕고개 깎아만든 철로… 조선인 노동 착취 흔적 
3·1운동 참가한 서른 살 이수욱 등 청년 애국지사 17명
목판 인쇄로 태극기 제작해 3월 13일 만세운동
목천-전의 인접해 인근 충청지역 만세운동 재점화


#1. 1905년 음달말과 양달말

충남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는 비탈진 자그마한 산을 사이에 두고 ‘음달말’과 ‘양달말’로 나뉜다. 볕이 잘 드는 곳은 양달말, 그늘진 곳은 음달말이다. 정겨운 이름만큼이나 산뜻한 풀내음이 짙고 정이 많은 동네였다. 옆집, 앞집의 머리가 맞닿은 음달말에 이수욱이라는 열여섯 살 청년이, 바로 건너 양달말에는 추경춘·득춘 형제가 각각 살았다. 이들 말고도 자그마한 전의면 일대에는 신지식에 호기심이 많은 청춘이 여럿 있었다.

1905년 일제는 전의면 덕고개를 깎아 철로를 만들었다. 철로는 인접한 도로보다 낮다.
1905년 일제는 전의면 덕고개를 깎아 철로를 만들었다. 철로는 인접한 도로보다 낮다.
덕고개 석비 뒤로 철로가 보인다.
덕고개 석비 뒤로 철로가 보인다.

그러던 어느날 평화롭던 마을에 덕고개를 뚫고 경부선 철로가 들어선다는 말이 마을에 돌기 시작했다. 덕고개는 높고 험준한 차령산맥 일부로 천안·목천과 전의면을 연결하는 비교적 지대가 낮은 고개였는데 아무리 낮은 고개라지만 철로를 놓는다니.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말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일제가 마을 사람들을 투입해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하면서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삽을 들고 흙을 퍼냈다. 그들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금세 거뭇거뭇해졌다. 고개가 사라진 빈자리는 이수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분노가 점차 채워졌다.

#2. 1919년 전의역

이수욱이 서른 살이 되는 해. 그러니까 경부선 개통과 동시에 전의역과 조치원역이 문을 연 지 꼬박 14년이 됐을 무렵 이 두 역을 거쳐 경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었다.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마을의 젊은 선구자들이 이화학당 등으로 매일 같이 통학하면서다. 조치원역에 사람이 붐비면서 가로등도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오늘날 전의역.
오늘날 전의역.

이수욱도 경성행 전의역 기차를 자주 이용하는 탑승객 중 한 명이었는데 2월 26일은 평소와 달랐다. 3월 3일 진행될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수욱이 경성에 도착하고 며칠 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사람들이 서서히 모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전의행 기차에 올라탄 이수욱의 마음에도 독립을 향한 갈망이 점차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벗들에게도 알려야겠다는 일념이었을 거다.

#3. 3월 13일 전의장터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을 하나둘 모았다. 그렇게 이수욱은 본인을 포함해 추경춘, 추득천, 윤자훈, 윤자벽, 윤상원, 윤상억, 김재주, 윤상돈, 윤상은, 윤자명, 이규영, 이수양, 이상건, 이장희, 이광희, 정상복, 정원필 등 17명과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서울에서 돌아온 직후 곧바로 만세운동을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까지 일주일 가량 남았다. 이들은 비밀리에 목판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군중에게 나눠주며 독립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세종 전의장터 만세운동 터.
세종 전의장터 만세운동 터.
세종 전의장터 만세운동 중심부. 1919년 3월 13일 이수욱 등 군중들은 전의장터에 모여 싸전골목과 전의역을 돌며 만세를 외쳤다.
세종 전의장터 만세운동 중심부. 1919년 3월 13일 이수욱 등 군중들은 전의장터에 모여 싸전골목과 전의역을 돌며 만세를 외쳤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3월 13일(음력 2월 12일) 싸전가게가 줄 잇고 있는 전의장터 중심부에 모였다. 이수욱, 추득천, 이광희 등은 마을 군중과 같이 태극기를 드높이 들며 만세를 불렀다. 전의역부터 싸전골목까지 계속해서 돌며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일제의 주재소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의 만세 함성은 조치원역에 있는 철도수비대가 오기 전까지 계속됐다.

철도수비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냈다. 이후 추경춘·득천 형제는 전의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7명 중 7명이 옥고를 치르다 생을 마감했다고 증언했다. 개중에는 만세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을 더이상 가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태형을 치러 산송장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의장터 만세운동이었지만 이후 천안 등에서 만세운동이 재점화되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3·1만세운동기념 상징조형물.
3·1만세운동기념 상징조형물.
이상호 지역사연구가가 19일 전의역 앞에 설치된 3·1만세운동기념 상징조형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상호 지역사연구가가 19일 전의역 앞에 설치된 3·1만세운동기념 상징조형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 그리고 지금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세종 전의면 읍내리라고 부른다. 1번 국도보다 낮게 깔린 덕고개 철로는 그대로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은 전의장터 만세운동도 기억할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꼬박 105년이 흐른 오늘에야 김재주 선생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꺼져가던 충청지역 만세운동에 불을 댕긴 3·13일 전의장터 만세운동에 사람들은 관심이나 있을까.

글·사진=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이수욱 선생 생가.
이수욱 선생 생가.
윤상은 독립유공애국지사 기념비.
윤상은 독립유공애국지사 기념비.
전의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세워진 애국지사 추모비.
전의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세워진 애국지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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