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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대전에서 진료 보던 서양의 김종하 선생 이야기

[대전 최초의 양의원 중앙의원을 아십니까]

2024. 05. 02 by 김동은·김고운 기자
중앙의원 전단지. 대전시립박물관 제공

1928년 대전에서 개원한 중앙의원. 대전에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데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2021년 ‘대전의 의료와 위생’이란 학술대회에서 처음 조명됐는데, 전까진 1940년 조선총독부 의사고시에 합격한 박선규가 1946년 문을 연 박외과라는 이름과 수많은 병원 중 하나로만 치부됐다. 첫 조명 이후 3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중앙의원에 대해 아는 대전시민은 없다. 존재가 알려진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대전시민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남은 정보도 미미하다. 100여 년 전 대전시민은 물론 조선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의사 김종하 선생과 중앙의원을 재조명해 본다.

   by 김동은·김고운 기자   

김종하(金鍾夏·1900~?) 선생은 대전 최초의 서양식 근대 사립병원 중앙의원(中央醫院)을 개원한 의사다. 1918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1919년 3·1운동에도 참여해 투옥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8년 1월 대전에 중앙의원을 열었다. 당시 대전에는 일본인 의사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는 하용철과 더불어 당시 단 두 명뿐이던 조선인 의사였다. 조선인들은 일본인 의사를 만날 기회도 없었을뿐더러 만난다고 해도 낯선 언어와 차별적 진료 탓에 애를 먹었다. 당시 시민에게 조선 의사 김종하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조선인의 근대의학 혜택이 소외된 상황에서 김종하 덕에 시민들은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1932년 10월 돌연 의원을 정리하고 고향인 함경북도 옹기로 귀향 후 의사 생활을 하다 1946년 함흥의과대학 부속병원 소아과장을 거친 후 1948년 12월 사직했다.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가 약 4년간 대전에 머무르며 의술을 펼친 내용을 토대로 그의 진료일지를 재구성해 본다.

김종하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사진. 대전시립박물관 제공
김종하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사진. 대전시립박물관 제공

◆ 1928년 3월 부부싸움에 아이는 무슨 죄인가
철교에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아녀자 홍순남이 응급환자로 들어왔다. 그는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든 임산부였다. 곧 있으면 금쪽같은 아이도 만날 터인데….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몬 건 가난이었다. 만삭의 몸에도 간신히 공장에 나가 풀칠을 하고 남편인 박룡하도 일정한 곳 없이 막노동판을 전전했단다. 그놈의 가난 때문에 남편과 싸운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철교에서 떨어져 죽으려 했단다. 부부도 안타깝지만 배 속 아이는 무슨 잘못인가. 그래도 살아서 참 다행이다. 100년 뒤 이 땅에는 가난 때문에 아이의 목숨까지도 버리려는 이가 없길 바란다.

◆ 1928년 4월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흥술이란 자가 쥐약을 먹고 거품을 물고 실려 왔다. 연인인 최순례와 음독자살을 시도했는데 얽힌 삼각관계가 안타깝다. 김희도란 자가 최 씨를 삼백 원에 샀고 사정을 안 흥술은 아버지와 형에게 최 씨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모질기도 하지. 둘은 함께 쥐약을 먹고 저승에서의 사랑을 약속했다. 그러나 흥술만 살아남고 최 씨는 저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간신히 깨어난 흥술은 병원이 떠나가라 통곡했다. 두 남녀의 운명이 참 가혹하다.

◆ 1928년 4월 천연두 고놈
오늘은 동네 왕진을 다니다 깜짝 놀라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세상에 두창(천연두)으로 사망한 사체를 나무 위에 걸어놨더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게 두창을 쫓는 관습이란다. 종두법이 발견되기 전 열에 아홉은 죽는 무시무시한 병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 이런 미신을 믿고 있다니…. 두창을 예방한다고 개를 잡아먹질 않나. 두창 귀신이 피를 무서워한다고 개의 피를 문 앞에 흘려놓질 않나. 두창은 열악한 위생이 원인이 되는 병인데 미신만 믿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동네 극빈층에게 무료 접종을 해주려 병원에 데려왔는데 뾰족한 주삿바늘이 무서워 달아나 버렸다. 썩을 일본이 조선인을 박멸하기 위해 독물을 주사한다는 소문이 도니. 의술은 인술이랬다. 민중에게 설명과 설득을 하는 수밖에 없다. 환자가 고난에 허덕이는데 발 뻗고 있는 게 어찌 의사라 할 수 있겠는가.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전단지도 만들어 돌려야겠다. 극빈층은 무료, 전단을 보고 오는 이는 할인도 해줘야지.

◆ 1931년 4월 폭력 남편의 만행
얼마나 심한 구타를 당했는지 몰골을 알아볼 수 없는 이약성이란 자가 응급환자로 이송됐다. 매부인 조주복과 그 집안사람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단다. 매부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아내인 이 씨에게는 어찌했으랴. 그는 시아버지와 남편 조 씨의 까닭 없는 모진 학대와 구박에 못 이겨 본가로 도망을 왔다. 조 씨는 친척들과 함께 아내 집에 찾아와 쑥대밭을 만들었다. 처남인 이약성은 어찌나 심하게 두드려 팼으면 앞니가 다 나가고 흉부에 타박상을 입었다. 지금도 조 씨는 결혼 당시 준 납폐금을 돌려달라고 병원에서 소란이다. 병원 일이 바빠 혼인은 아직인 나로선 아내를 가혹하게 대하는 저것이 인간인가 싶다. 100년 뒤 이 땅에 저런 자는 없어야 할 텐데….

중앙의원은

1928년 일제강점기 대전 본정동 2정목 37에서 문을 열었다. 지금의 중구 인동 근처다. 김종하 선생이 대전에 병원을 세우게 된 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대전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 일본인이 원장인 병원이 천지였기에 아닐까 싶다.

실제 1930년 개원한 도립대전의원의 전신인 자혜의원(慈惠醫院)은 행정기관이 운영하는 지역 내 유일한 종합병원이었고 이외에 화지의원(和智醫院), 청류의원(靑柳醫院), 영의원(永醫院), 원의원(原醫院), 곡전의원(谷田醫院) 등도 일차적인 목적은 대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의 질병을 진료하는 것이었다.

당시 병원에서 조선인이 진료를 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와 마찬가지였던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충분히 김종하 선생이 개원을 결정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중앙의원 규모가 어땠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대전 최초 사립병원이라는 사실이라는 점과 중앙의원 충북 옥천에 분원을 설치해 소외된 지역에서도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중앙의원 위치가 표시된 대전지형도. 대전시립박물관 제공
중앙의원 위치가 표시된 대전지형도. 대전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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