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1960년 3월 8일 대전
1960년 3월 8일, 대전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3·8 민주의거는 독재의 길을 재촉하던 이승만정부에 대한 경고였다. 그때 그 사람들은 스스로가 내디딘 작은 움직임이 ‘혁명’의 큰 진전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시간을 거슬러 1960년 3월 그때로 돌아가 4·19 혁명의 출발선에 서 있던 사람들의 ‘그날’과 그 생각들을 제3자의 시선으로 마주했다. 편집자

학원 자유화 외치며 거리로 나와
주먹 불끈 쥐고 무력진압에 맞서
순수한 열정은 거세게 타오르며
민주주의 열망 전국으로 퍼트려
#1. 사실 두려워요
학생들은 펜을 들고 책상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고 했다. 이제 갓 열두 살이 된 대한민국은 아직 어렸고 장년이 되면 나라의 운명을 짊어져야 할 우리가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참는다면 후손들은 무슨 면목으로 볼 것이며 과연 이대로 모두가 꿈꾸는 살기 좋은 나라로 나아갈 수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신념이 그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1960년 3월 8일부터 대전에서도 이 열망은 조금씩 꿈틀거리며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날 한 기자를 만난 청년이 “나라가 이 모양인데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고 외친 건 혼란스러운 세상에 눈을 감아버린 어른들에게 보내는 각성의 요구였다.
열기는 뜨겁고 기세는 맹렬하게 타올랐다. YMCA 회관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청년과 노년 기자의 만남은 그래서 더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도심 곳곳 이유 있는 고요함이 깔린 가운데 노(老) 기자가 시위에 나서게 된 이유를 묻자 청년은 말했다. “사실 두려워요. 제가 하고 있는 이 행동이 어떤 결과가 될지도 정확히 알 수도 없고요. 그런데 눈 감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누군가는 잘못됐다고 말해야 우리 세상도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2. 눈 감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청년의 말처럼 어렵게 행동에 나선 학생들의 움직임은 15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장면 민주당 부통령후보의 선거강연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날 오후 4시 대전고 학생 1000여 명의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외침에 시민들도 동참, 뜻을 같이했다. 기자가 경찰의 무력 진압에 대한 청년의 생각을 물었다. 이미 시위의 세(勢)는 점차 확장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무력 진압으로 일관하는 경찰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주먹을 불끈 쥐며 거세진 시위 열기와 더 크게 타오른 분노를 표출했다.
“학생들의 순수한 학원 자유의 요구를 마치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데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요. 당국이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확산하는 게 두려워 지금 대학을 찾아다니며 단속을 요구하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이는 우리의 요구가 틀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죠.”
#3. 분노에 분노가 더해져
대구에서 대전까지 이어진 시위는 10일 경기 수원·충북 충주, 11일 충북 청주, 14일 강원 원주·경북 포항과 문경까지,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학원 자유화를 넘어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 당시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일면서 반정부 시위로 양상도 바뀌었다. “학원 자유화 요구로 시작된 시위가 어느새 민주화 요구로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청년도 크게 공감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우리의 거사는 오로지 정의감과 자발적 의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학생들의 주장은 이제 시민들의 꿈이 됐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린 더 나은 세상으로의 길을 갈 뿐”이라며 의지에 충만한 모습을 보였다.
어른들 대신 학생들이 나서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법, 억압과 폭정에 대한 항거 의지를 되새기며 성스러운 민주의 정신을 표출해내고 있는 가운데 청년은 이를 “인권을 되찾기 위한 저항”이라고 규정했다. 1960년 4월의 봄을 앞둔 가운데 학생들의 의로운 발걸음이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