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생일 고증 논란

▲ 1919년 3월 27일 인동장터 만세운동 과정에서 체포된 김완봉·김창규·윤명화·김성현 등의 판결문. 국가기록원 제공

그동안 3월 16일로 알고 있었지만
사료·학계 등 ‘3월 27일’ 힘 실어
대전市史 기술적인 오류 바로잡고
역사적인 계승 방법부터 논의해야

<속보>=역사에는 최대한 객관적 정황이나 증거를 바탕으로 고증해도 오류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돼 역사적 사실이 뒤집히거나 다른 해석으로 실체적 진실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이유다. 1919년 3월 16일 벌어졌다는 대전 인동장터 만세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 벌써 23년째 해마다 1919년 3월 16일을 기억하는 갑남을녀들의 만세삼창이 이어지곤 있지만 정작 사료(史料)가 말해주는 그날은 3월 27일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본보 3월 9일자 1면 보도>

◆3월 16일 만세운동 있었나?

‘인동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30대 한 청년이 장터에 쌓아 놓은 가마니 더미 위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됐다. … 전통 생업에 종사한 젊은 민초를 중심으로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평화적·비폭력적인 독립만세운동에서 수십여 명의 사망자와 수백여 명이 크게 다쳤다.’

- 인동장터 만세운동 유래비 中

대전 산내면 출신의 양사길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는 1919년 3월 16일 인동장터 만세운동의 역사적 근거가 부실하다는 학계의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인동장터에서 벌어졌다는 3월 16일 만세운동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사료가 없어서다. 대전시가 발간하는 ‘대전시사(大田市史)’가 사실상 유일하다는 게 학계의 진단이다.

대전시사에선 현재까지 대전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통하는 이날 인동장터 만세운동 과정에서 양사길 등을 포함, 1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체포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를 확인할 기록은 찾기 어려운 게 아이러니다. 통상 사상자가 적잖이 발생했다면 일제 기록에서도 흔적이 있어야 상식적이지만 3월 16일 인동장터 만세운동의 경우 그렇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이 정도 규모의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최소한 일제의 보고라도 있어야 하지만 순국했다는 양사길의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고 이날 참여자 중 지금껏 포상자가 단 한 명 없는 점도 퍽 의외다.

지난 16일 동구 만세로광장에서 열린 인동장터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모습. 대전시 제공
지난 16일 동구 만세로광장에서 열린 인동장터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모습. 대전시 제공

◆“인동 만세운동은 3월 27일”

현재까지 인동장터 만세운동의 실질적인 현황이 확인되는 기록이 남은 건 3월 27일과 4월 1일이다. 휘문의숙 유학 중 서울에서 벌어진 3월 1일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 김창규 등과 3월 27일 인동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정철, 4월 1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직원·박종병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 일제 보고에 의하면 이날 만세운동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인물은 9명이나 된다. 앞서 3월 16일 상황과는 묘하게 다른 대목이다.

독립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박걸순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도 여기에 주목한다. 박 교수는 인동장터 만세운동이 3월 16일이 아닌 27일에 발생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2020년 충남대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학술대회에서도 이 같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3월 16일 인동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제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고 15명이 순국했다면 중대한 사건이라 일제가 보고를 누락할 리 없으며 양사길의 인적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4월 1일 인동장터 만세 운동의 와전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인동장터의 첫 만세 시위는 3월 27일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그는 3월 27일 인동장터 만세운동 과정에서 체포된 김완봉·김창규·윤명화·김성현 등이 유죄판결을 받은 공주지방법원 판결문, 충남도장관에게 보고된 문서가 남아있는 점을 유의미한 대목으로 꼽는다. 인동장터 만세운동이 3월 16일이 아닌 3월 27일 최초 발생했음을 사료가 입증해주고 있어서다.

박 교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논문 ‘대전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성격’ 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현재의 대전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인동장터가 아닌 유성장터로 짚는다. 유성장터 만세운동은 인동장터 만세운동보다 10여 일 앞선 1919년 3월 16일 이상수·이권수에 의해 벌어졌는데 이 둘은 보안법위반으로 1년 2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 대법원에 상고하며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기각당해 옥고를 치렀다. 공주지방법원·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는 두 사람의 유성장터 만세운동 모의 과정과 전개의 기록들이 세세히 담겨 역사의 증거로 남아 있다.

대전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놓고 인동장터와 유성장터로 서로 엇갈리는 기억과 기록, 인동장터에서 첫 만세운동 발생일에 관한 고증 논란을 학계는 말 그대로 검증의 소홀, 현상적 사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탓으로 본다. 그러다보니 여러 사실이 혼재돼 방치되면서 논의조차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거다.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인동장터 만세운동이 3월 27일에 있었음을 학계에서 문제제기했으면 관할청에서는 그에 걸맞은 결정을 내려줘야 하는데 눈치만 보고 미루고 있다”며 “대전시사에 기록된 인동장터 만세운동의 기술적 오류부터 바로잡고 그에 따른 역사적인 계승 방법들을 다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꼬집었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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