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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노인들의 시간] #1 그들만의 홍대, 실버영화관

2024. 02. 05 by 김지현 기자

    노인들의 시간    

 

녹원의 천사, 7인의 말괄량이, 에메랄드….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됐다고 영화 한 편을 볼 낭만조차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시끌벅적한 도심 한복판서 적막한 시간을 견디는 노인들. 단돈 2000원으로 이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공간이 있다면 믿어질까.

서울, 인천, 안산, 천안 등 전국 4곳에 위치한 ‘실버영화관’ 이야기다. 실버영화관에서는 날마다 어르신들 눈높이에 맞춘 영화가 상영된다. 게다가 출출함을 달래줄 착한가격의 음료와 간식까지. 실버영화관은 외로움과 고립감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노인들을 위한 심리적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하며 문화공간이라는 개념을 뛰어넘고 있다. 영화관을 찾은 노인들은 유쾌하게 말한다.

“여기가 우리만의 ‘홍대’지~.”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 클래식' 간판이 보인다.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 클래식' 간판이 보인다.

◆ 서울에 왔다

칼바람 불던 어느 주말. 차갑고 미끌거리는 눈비가 휴대전화 화면에서 가리키는 목적지를 자꾸만 가렸다. 지도 앱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목적지는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56 낙원악기상가’. 화살표가 도착지에 다다르자 ‘허리우드 클래식’이라는 간판과 건물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고전영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눈비가 내리는 궂은 날일수록 노인의 무료함은 더 커지는 것일까. 4층 허리우드 클래식 영화관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는 이미 만원이었다.

다음 차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한 어르신이 “오늘은 ‘말 없는 사나이’였던가?”라며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최신 영화로 가득한 영화관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만 이용하는 내겐 처음 들어보는 영화 제목이 생경하기만 했다. 휴대전화로 영화 제목을 검색해보니 1944년도 영화였다.

한 어르신이 허리우드 클래식 실버영화관 게시판에서 상영작을 살펴보고 있다. 게시판은 녹원의 천사, 7인의 말괄량이, 에메랄드 등 50~60년대 개봉했던 영화 포스터들로 가득했다.
한 어르신이 허리우드 클래식 실버영화관 게시판에서 상영작을 살펴보고 있다. 게시판은 녹원의 천사, 7인의 말괄량이, 에메랄드 등 50~60년대 개봉했던 영화 포스터들로 가득했다.

실버영화관, 서울 등 전국 4곳
서울 ‘허리우드 클래식’ 가보니…
영화 티켓 2000원, 음료는 1000원
매표소·매점 직원도 어르신들

◆타임머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주한 실버영화관은 신세계였다. 2~3명의 노인들이 상영예정작 시간표를 살펴보고 있었고, 매표소 앞에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녀 어르신 두 분이 데이트를 온 것인지 영화 티켓을 구매하고 있었다. 그림으로 그려진 영화 포스터 아래로 흑백의 찰리 채플린과 눈이 마주쳤다.

티켓 끊는 어르신들. 그리고... 찰리 채플린과 눈이 마주쳤다.
티켓 끊는 어르신들. 그리고... 찰리 채플린과 눈이 마주쳤다.

상영되는 영화는 대부분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세상으로 나온 것들이었다. 실버영화관에서는 서른 살의 내가 낯선 존재가 돼 뚝딱거리고 있었다. 이따금 어르신들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영화표를 구매해야 하는 곳을 알려주기도 했다. 일반인(?)은 7000원만 지불하면 영화를 볼 수 있다.

어르신들 틈에서 멋쩍어하는 나에게 한 노인이 다가와 내부를 구경시켜주겠다며 이끌었다. 실버영화관에 들어서자 곧 영화가 시작되는 것인지 입장을 기다리는 노인들로 가득했다. 영화관 한켠에는 추억의 책가방과 교복이 놓여있었고, 라디오 DJ는 없었지만 라디오 부스도 있었다. 매점에는 음료와 과자가 판매되고 있었는데 대부분 가격은 4000원을 넘기지 않는 듯했다. 성함조차 모르지만 영화관으로 나를 이끌어 준 어르신이 건네신 오렌지 주스 한 캔은 1000원이었다. 상영관 내부는 꽤 넓었다. ‘낭만극장’ 좌석표시도를 보니 193석이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어르신들. 실버영화관 내부에는 매점, 라디오부스 등이 마련돼 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어르신들. 실버영화관 내부에는 매점, 라디오부스 등이 마련돼 있다.

◆ 이봐 젊은이, 여기~ !

실버영화관을 구경하는 내게 어르신이 손짓하며 부르셨다. 회계사로 일생을 살다 퇴직했다는 노신사는 “오늘은 비가 내려 많이 걷지 못했다”며 웃어보였다. 주름진 노인의 손에 쥐어진 휴대전화에는 ‘7210보’가 적혀있었다. 노인의 걸음에는 종착지가 없었나보다. 참 신기한 게, 이곳에서 만난 노인들은 모두 나를 불편해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았다. 대화할 누군가가 필요한 듯했다. 노인의 공간에 들어온 내가 느끼기에는 굉장히 큰 환대였다.

“내가 (대학) 58학번이다. 옛날에 이곳이 헐리우드 극장이었는데 지금 상영하는 영화들은 그 당시에 봤던 것들이다. 오래전 봤던 것들이라 보다가 잠들기 일쑤지만 우리가 문화생활을 할 공간이 있다는 게 참 고맙지 않냐.” 어르신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85세가 되면서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가 됐다. 젊을 때 바깥일을 하느라 요리도 못해본 내게 음식을 차려주는 사람도 이제는 없어. 인근에 무료급식소도 있고, 음식점 자체도 식대가 3000~4000원으로 저렴해 혼자서 갈 곳이 여기 말고는 없다.” 그러면서 “사실 영화가 2000원으로 저렴하지만 수입이 마땅치 않은 노인들은 이조차도 부담스러워한다. 그럼에도 2000원을 모아 영화를 보러오는 이유는 이곳이 우리(노인)의 낙원이기 때문이지”라며 미소지었다.

영화 상영을 앞두고 극장 내부로 들어가는 어르신들. 극장 안내를 돕는 사람도 어르신이다.
영화 상영을 앞두고 극장 내부로 들어가는 어르신들. 극장 안내를 돕는 사람도 어르신이다.

문화공간 넘어 심리적 쉼터 역할
대전 등 충청권도 실버영화관을
지자체-민간 공간마련 합심해야

◆ 우리 지역에도 만들자

실버영화관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매표소와 매점, 상영관 입구에 있는 직원 모두 노인이라는 점이다. 지난 2009년 개관한 이곳 실버영화관은 2015년 100만 돌파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설은 물론, 근무하는 직원들도 모두 노인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어서가 아닐까.

허리우드 클래식 실버영화관 김은주 대표는 “외로움과 고독함으로 노인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노인에게 문화공간을 제공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라며 “영화관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관람료가 최소 7000원은 돼야 하지만 어르신들이 부담없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도록 2000원으로 책정하고, 큰 영화 자막은 물론 직원들도 또래 노인으로 해 불편한 부분을 최소화했다. 타 지역에도 실버영화관은 있다. 지자체의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낙원상가 4층에는 노인들의 낙원이 있다. 지하상가와 한적한 공원에서 마주했던 노인들의 공허한 눈동자가 이곳에서는 반짝였다. 고독한 어르신들의 무료한 삶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글·사진=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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