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운영위원

보재(溥齋)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태어났다.

1876년 지금의 명동, 우당 이회영 선생댁 옆 승지 이용우 대감의 양자(養子)로 입양된 후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갑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896년 성균관 교수와 관장 그리고 한성사범학교 교관과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를 올리고 1905년 을사늑약 파기 운동 등 그 침략성에 맞서 죽기로 맹세하고 싸웠다.

선생의 그 직접적인 항거는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의 첫 시발이었고 민족의 투쟁 역사는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때 선생이 고종황제에게 '명예로운 자결(自決)' 을 촉구한 상소는 조선 500년 역사에 명 상소였다.

1906년 북간도 용정에 망명 이후 최초의 근대식 민족학교인 서전서숙 건립과 1907년 '헤이그 특사' 그 파란의 삶은 살아서는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고, 죽어서도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의 고난과 좌절 풍찬노숙의 망명 생활에 그 고단함을 어찌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있을까?

러시아 소왕령 수분하 강가에 화장하여 뿌려진 고혼(孤魂)은 1996년 12월 27일이 되어서야 혼을 부르는 초혼제가 치러지고 한 줌의 재로 변한 그의 외로운 혼백은 만주와 연해주, 유럽과 미주 대륙을 횡단하고 다시 연해주를 거쳐 동해, 대한해협, 황해를 휘돌아 진천 생가로 돌아왔다.

사후 90여년 만에 고국을 찾은 그의 혼은 덕수궁에 연금되어 고독한 만년을 보내고 있을 고종을 알현(謁見)하고 황제의 특사로서 이루지 못한 사명을 보고하고 서로 부둥켜 앉고 목놓아 울었으리라!

1997년 3월 2일이 되어서야 유해가 뿌려진 그 강가 모레를 가져와 부인 달성서씨와 합장하고 지역에서 뜻을 모아 퇴락한 사당 숭렬사(崇烈祠)를 다시 짓고 작은 동상까지 건립하여 축문을 짓고 읽는데 수많은 사람 중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해외 한인(韓人)의 결속과 대동단결을 부르짖고 만주, 연해주에서 성명회를 조직하고 1909년 연해주 봉밀산 밀산(密山에) 최초의 항일무장투쟁운동기지인 '한흥동(韓興洞)' 을 세우고 1910년 한일 병탄 후 13도의군을 창설하였다.

1913년 중국 나자구에 최초의 독립군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 설립과 1914년 권업회 설립과 권업신문 발행 그리고 1914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의 수립은 1915년 신한혁명당 설립과 함께 1919넌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그 정점이 되었다.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대학자로도 평가되었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 풍전등화와 같았던 망국의 전 과정을 하나하나 목도(目睹)하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하얗게 새웠을까?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1917넌 3월 2일 우스리스크에서 향년 48세로 홀로 영면하였다.

이에 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는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顯彰) 하기 위하여 국가보훈부, 충북도, 진천군과 함께 선생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내년 그 준공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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