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력은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1차적인 지표이다. 중국 전국시대 맹자는 비록 왕정(王政)을 통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위나라의 혜왕이 맹자에게 물어본 질문 중 하나가 백성이 많아지지 않는 것[寡人之民不加多]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군사력은 국가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군사력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흔히 병력, 무기체계, 전략·전술 등이 있다. 그 중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무기체계, 그 중에서도 조선 수군의 무기체계이다.전근대 왕조의 수군의 병력, 무기, 전술은 기본적
1798년 정조는 이조원(李祖源)을 정사로, 김면주(金勉柱)를 부사로, 서유문(徐有聞)을 서장관으로 하는 삼절년공겸사은사행(三節年貢兼謝恩使行)을 꾸려 청나라 연경으로 파견하였다. 이 사행은 이해 10월 19일부터 이듬해 4월 2일까지, 160일 간의 여정이었다. '연행신장'은 이 사행 길을 떠나는 김면주를 위로하여 동료와 일가친척들이 쓴 송별시를 엮은 첩으로, 건·곤 2첩이다. ‘건’에는 김면주의 동료 12인이 쓴 12편의 시, ‘곤’에는 14인의 일가친척이 쓴 1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각양 색상의 고급 종이에,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왕조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중앙통치조직을 구성하고, 군현제를 바탕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정비해갔다. 중앙 관료들이 무능하거나 비리를 저지른 경우 언론·감찰기구였던 대간(臺諫)이 적발할 수 있었지만, 수령과 변장 등 지방관은 통제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위해 국왕은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시하고 백성의 질고(疾苦)를 직접 살피게 했다.19세기 끝자락까지 파견된 암행어사 중에는 이름 있는 인물이 꽤 있었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도 그 중 한명이다.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돌이켜보면 ‘공부’하면서 공부가 무엇인지, 왜 하는지와 같은 류의 고민을 해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답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취업’ 같은 것 말이다. 대신 고민은 늘 ‘잘 하는 방법’에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비법을 만들어보지만 누구나 우등생이 되지는 못하고, 우등생의 비법이 누구에게나 통하지 않는 게 공부, ‘노력’과 ‘끈기’만이 만고불변의 비법이라는 것을 깨달을 즈음엔 공부는 이미 삶에서 멀어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대부분이 겪은 공부에 대한 슬픈 회고가 아닐까 싶다.옛사람들의 공부는 우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