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골선(고창석, <조선수군과 해양유물 도록>, 장보고, 2007에 수록)
해골선제략. 홍주성역사관 소장

군사력은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1차적인 지표이다. 중국 전국시대 맹자는 비록 왕정(王政)을 통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위나라의 혜왕이 맹자에게 물어본 질문 중 하나가 백성이 많아지지 않는 것[寡人之民不加多]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군사력은 국가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군사력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흔히 병력, 무기체계, 전략·전술 등이 있다. 그 중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무기체계, 그 중에서도 조선 수군의 무기체계이다.

전근대 왕조의 수군의 병력, 무기, 전술은 기본적으로 전투선박인 전선(戰船)을 기본으로 한다. 조선전기 수군의 전선은 맹선(猛船)으로 규모에 따라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으로 불렸다. 그러나 1555년(명종 10) 새로운 전선이 개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갑판 주위에 판자로 된 두꺼운 방패를 빈틈없이 늘어세우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갑판을 설치했다. 이를 통해 노를 젓는 격군(格軍)은 갑판 아래 보호된 공간에서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사수(射手)와 포수(砲手) 등 전투병력은 격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또한 판옥선은 맹선에 비해 배의 높이가 높아졌는데, 이로 인해 적병이 배 안으로 뛰어들기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화약무기의 명중률과 사거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해군의 최고무기라 할 수 있는 전선 개발로 영화 ‘명량’에서 볼 수 있었듯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판옥선은 해전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연해지역에 광범위하게 배치되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서서 조선의 해안에 새로운 적(賊)이 등장하였다. 일본과의 관계는 광해군대 체결된 기유약조로 인해 평화적인 관계로 전환되었지만, 남해안과 서해안 연안에 황당선(荒唐船)이라고 하는 중국의 선박이나 해적이 자주 출몰하게 되었다. 황당선은 주로 고기잡이를 목적으로 출현하였는데, 연해에서 밀무역을 하거나 해적질을 해서 문제가 되었다. 지금 중국어선이 서해안 바다에서 우리 해경과 마찰을 빚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판옥선은 황당선에 대한 대응능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탑승인원이 무려 150명이 정도로 많아 출발 준비 시간이 오래 걸렸고, 속도도 느렸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기동성이 있고, 전투에 효율적인 전선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739년(영조 15) 바로 해골선(海鶻船)이 개발되었다. 그 중심에는 충청남도 당진에서 세거하고 있던 담양전씨 전운상(田雲祥)이 있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그는 중국 병서인 '무경절요'에 기록되어 있는 병선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배 모양이 송골매[鶻]와 같다고 해서 해골선이라고 불렀다. 이 배는 선수가 낮고 선미가 높은 유선형 모양으로 설계되어 바람의 저항을 상쇄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배의 양옆에는 날개가 있어 파도가 높더라도 전복될 위험이 적었고, 지붕을 가지고 있어서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없게 설계되었다. 이로 인해 유사시 아군의 행동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아 승선한 전투원의 생존율을 높였다. 이 해골선은 저판의 길이가 11.25m(37.5척)이고, 승선인원은 약 56명이었다. 영조는 이 해골선의 성능을 파악하고, 삼도수군사령부인 통제영과 각도 수영에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남아 있는 해골선의 도안이 마치 오리배와 같아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대 외교 상황과 시대 흐름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고자 독자적인 기술로 판옥선, 거북선, 해골선 등 지속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방산비리로 시끄러운 지금은 더욱 그렇다.

문광균(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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