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닫힌 공간이다. 닫혀있다는 다른 의미는 열려있다는 뜻도 담고 있다. 나갈 수 없다고 생각되는 섬은 누구나 들어올 수도 있다는 섬이 되기도 한다. 나가고 들어오는 섬. 미지의 세계이다. 어떤 사물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지 어떤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섬에 가고 싶어진다.식물과 나무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지친 영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무가 있고 풀이 있다는 것은 생명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그곳에 눕고 싶은 상처들이 있다면 이 섬으로 오라. 작가가 만든 섬. 지도에는 없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섬이다
‘품’이라는 말, 어원을 찾아보면 엄마다. 엄마의 마음에서 나왔다. 품에 살고 있는 것이 참 많다. 따듯함은 기본이요. 포근함은 덤이요. 포용은 끼워준다. 그 모든 것을 안아줄 단어 하나가 있는데 바로 모성애다.엄마 품은 이렇게 다양한 감성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고, 꺼내 쓰고 있지만 채워주지 못한다. 그런데 옹달샘처럼 마르지 않고 솟구치기까지 한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면 변함없이 우리를 맞이해 준다. 내가 행복하면 이 품을 잊고 산다. 힘이 들거나 아프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엄마의 품이다.
산에서 고사목을 본 적이 있다. 죽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삶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런 몸으로도 산을 떠나지 못한 나무를 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미련이 남았을까. 아니다, 자연이 아직 그를 보내지 않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찾아들었다.숲에는 많은 생명들이 산다. 그래서 숲이 엄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무와 나무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붙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살아야 할 이유가 많다. 숲에 다양한 생명들이 공존하듯이 인간은 세상에서 서로 밀고 당기고 감으며 공간을 차지하려고 한다. 타고 남으면
인간은 오래 전 채집을 하며 살았다. 지금은 채집을 하지 않지만 인간의 유전자에는 채집의 본능이 아직 살아있다. 채집은 인간과 자연이 가장 가까이에서 소통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행위이다. 이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원초적인 것에서 인간은 위로받을 수 있다. 외롭거나, 힘이 들면 자연을 찾아 캠프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푸르다는 것은 초원이다. 초원은 우리들의 집이다. 방이다. 방에, 집에 온기를 불어넣은 것은 불이다. 불은 인간의 식생활을 바꾸어놓은 혁명적인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다. 작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떤 것이라도 하나 더 가지고 있으면 의식주를 구하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나 더 가지려고 배운다.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다.노력이라고 말하려고 하니 아프다. 작품 내의 인간에게는 날개가 있다. 날개가 있으면 지도를 건너가는데 빠를 것이다. 빠르다는 것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날개를 달았는데 곤충의 날개이다. 인간의 욕망의 무게를 날개가 이겨낼 수 있을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욕심 말이다. 박종욱(199
흰색(창틀)과 검정색(바위)은 독립적이다. 흰색은 흰색대로, 검정색은 검정색대로 자기만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본질을 가지고 있는 두 색이 만나면 새로운 본질(물결)을 가진 색이 탄생한다. 오랫동안 흰색을 탐했거나 검정색을 탐했다고 해도 회색은 흰색과 검정색이 발산하고 있는 다른 사물을 만들었다.회색 집안에 물결이 인다. 잔잔한 물결이 바위와 나무를 감싼다. 집 밖의 화분은 투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회색이 참 정갈하다. 회색이 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런 말을 하기 힘들지만 회색은 흰색과 검정색의 중간에 있기에 중심이 되고,
바람이 지나갔다. 햇살도 살짝 얼굴을 내민다. 푸른 잎과 단풍든 잎들 사이에 풀들이 길을 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오롯이 작품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간절하게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는 이 숲 끝에서 누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보다 숲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숲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함께 이 숲을 걸어가는 것이 더 행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꼭 한번 그리운 사람과 숲에 들어가 바람과 햇살 그리고 풀과 나뭇잎의 속삭임을 함께 듣고
네 개의 방이 있다. 각 방마다 일상의 물건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사람의 흔적이다. 눈을 기억하는 안경, 입맛을 기억하는 초콜릿, 그리고 커피. 기억을 그릴 수 있는 파스텔, 그런 기억을 달콤하게 꺼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케이크. 핸드백도 보인다.이 사물들을 만졌거나 보았을 사람들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통해 우리는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다시 흔적을 통해 기억을 유추해 본다. 안경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마신 커피와 아직 뚜껑을 열지 않은 컵.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포크. 어떤 사
우주는 어둡다. 밤만 존재하는 우주를 컴컴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별들이 있어서이다. 별들은 우주에서 볼 때 가로등 역할을 한다. 별이 없는 우주를 생각하면 삭막하다 못해 죽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별들이 어둠에 구멍을 뚫어준다. 어둠속에 불빛을 찾아 배 한 척이 떠 있다. 목적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불행의 별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꿈(배)은 어둠의 중심에 서 있지만 형광 색을 품은 별들의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원하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을
일상을 기억에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좋은 기억이 되었든 안 좋은 기억이 되었든 잊어야 또 다른 기억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또랑또랑 기억하고 있다면 마음의 옹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이 작품에는 다양한 선과 모양이 모여 산다. 선과 모양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통해 저마다의 순간순간 느꼈던 것들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어쩌면 인간의 뇌 공간에 1차, 2차, 3차 도형들이 있기에 순간의 기억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공간에 넣어두어야 한다. 시
산호는 바다에 산다. 그런데 분홍색 옷을 입고 산에 있다. 산은 만년설이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차갑다는 느낌이 없다. 산호색의 이미지 때문이다. 따듯한 기온의 바다에서만 살아서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산호산 아래 물안개를 머금고 있는 산이 있다. 그 안개 아래로 물살이 굽이친다. 흥미로운 것은 산을 지키다 죽은 고사목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오래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 산은 바다였고 바다는 산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작품이 낯설지 않다.김희정
계절마다 다양한 별자리를 볼 수 있다. 사자, 페가수스, 독수리, 황소, 큰 곰 등. 이런 별을 보면서도 은하수가 하늘의 호수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돼지가 유영을 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에서 엄마의 양수가 나만의 호수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작품 속 돼지처럼 나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분명 은하수를 보았는데 호수에서 매일 유영하는 돼지를 보지 못했다. 호수의 물이 흘러흘러 바다에 도달한다는 것은 우주의 섭리인데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의 뱃속에서 열 달 수영을 하며 보낸 시절을 잊어버린 것처럼. ‘하늘호수’가 잊고 지냈던 그
수백 년 나이를 먹은 나무들이 산다. 아니 태초의 엄마가 태어나고 엄마가 살았던 곳인지 모른다. 숲은 아버지의 이미지보다는 엄마의 이미지가 더 와 닿는다. 생명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암수 한 쌍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적확하게 말한다면 수컷(아버지)이 암컷(엄마)을 보고, 암컷의 시선은 훨씬 먼 곳으로 향했다. 기다린다는 것과 마중은 느낌이 다르다. 기다림은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중은 온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들은 누구를 마중 나왔을까. 당신이 지금 외롭거나 혼자라면 당신일 수도 있다. 그렇게 믿으면 외로움의
에덴동산에서 뱀과 인간은 악연이다. 뱀의 유혹에 이브는 아담과 사과를 먹고 만다. 뱀과의 인연이 인간의 굴레를 만들었다.알몸의 인간이 독(毒)이 퍼지고 있다. 인간이 뱀을 안아서 그럴까. 아니면 뱀이 인간을 안고 있어서 그럴까. 눈을 보면 인간은 공포, 자체를 품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옷도 입지 않은 채 두려움에 빠져 있을까. 몸을 감고 있는 뱀 때문일까. 아니면 원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생긴 죄 때문일까.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휴머니티라고 명명했다. 인간주의, 원죄의식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결혼식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부케다. 부케를 여러 번 보았지만 작품 속 꽃은 생소하다. 더욱이 계절 여왕인 5월에 만들어진 부케다. 5월의 어떤 꽃들을 가지고 이런 부케를 만들 수 있을까. 부케를 만드는 것이 직업이라도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신부라면 이런 부케 받고 싶지 않을까. 나만의 꽃, 세상에 나만을 위해 태어난 꽃을 신부들이 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작가는 세상에 없는. 그러나 앞으로 자연에서 볼 수 있는 풀꽃과 나무들을 부케라는 이름으로 구현했다. 오직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부케, 그것도 5월에 받을 수 있다
붉은 하늘에 산은 짙은 녹색이다. 붉은 기운은 생명을 품었다. 산의 등은 참 순하다. 순한 공간이 생명을 품었다면 말할 것 없이 아름답다. 산과 하늘이 색의 조화를 이루지 않고 있지만 조화의 부분을 건너가면 태초의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산은 엄마의 자궁처럼 느껴진다. 그 자궁을 생명의 색인 붉은 기운이 감싸고 돈다.이곳에서 우리가 태어났다. 내가 네가 그리고 우리가 태어난 공간이다. 앞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이곳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리고 끝내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럴 때는 붉은 기운은 하늘이 되고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의 시간을 맞이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가혹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 선택이라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많다.작가가 ‘작업하는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오늘 저녁이 양식이냐 한식이냐 중식이냐이다’라는 이 작품에서 얼굴을 숨긴 것은 의도적이다. 옷차림으로 볼 때 젊은 사람들(작가)이다. 젊은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까, 라는 생각은 읽을 수 없다. 작가에게 삶의 여유가 있다면 좋은데 그렇지 않다. 창작의 고통을
밀밭이 지평선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밀밭에 그림이 한 점 걸려있다. 자연의 밀밭은 수확의 계절에 들어섰다. 작가의 밀밭은 푸릇푸릇하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연과 나를 비교한다.수확의 계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면 산전수전 다 겪은 모습이다. 자연의 언어를 빌린다면 완성이다. 더 이상 어떤 첨가물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게 자연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럴 수 없다.우리는 자연의 품에서 나오는 햇살과 바람과 비를 만나 자신을 찾아갈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형성이 될지 모른다. 인간이 미완인 이유다. 이 작품의 제
조선의 집은 크지 않았다. 집이 작다보니 방은 더욱 작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방에 살림살이를 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최소한의 가구만 놓고 살았다. 이러다보니 무언가 대리만족할 사물이 필요했다. 그게 책가도이다.그림에는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구들이 들어가 있다. 이 작품 안에도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다. 이런 도구를 방에 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는 공간의 허락도 필요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조선 사회가 소박함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공간과 정책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공간도 극복하고, 국가 정책도 따르면
매미는 지상에서 일주일을 살기 위해 땅속에서 칠 년을 견딘다. 일주일과 칠 년은 대비된다. 칠 년이 아파 보이는 것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때문이다. 지상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모든 감정들이 매몰시키고 만다. 매미에게도 꿈이 있었는데 한여름 밤의 꿈이 있는데 그걸 읽지 못하는 이유가 칠 년과 일주일이라는 시간 때문이다.단 하루를 살든 백 년을 살든 꿈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간에 갇혀 매미의 꿈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백 년도 무의미해 질 수밖에 없다. 하루를 살더라도 꿈을 가자고 그 꿈을 위해 백 년을 준비한 시간이었다면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