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나일강 동쪽의 카이로 주(州)는 인구 1,000만 명의 도시이지만, 푸스타트(Fustat)·올드 카이로(Old Cairo)·나일강 서쪽 지역인 기자(Giza)까지 포함하면 무려 2000만 명이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 최대의 도시다. 카이로 구 시가지의 중심인 압딘 궁전(Abdin Palace)에서 남쪽으로 약 5㎞ 정도 떨어진 올드 카이로는 오늘날 카이로의 모체다.신바빌로니아(BC 626~539)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BC 568년 이집트 정복에 나서 하(下) 이집트와 중(中) 이집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나일강 건너 서쪽으로 약 12㎞쯤 떨어진 거대한 피라미드(Pyramid)와 스핑크스(Spinx)가 있는 기자(Giza)는 카이로 시내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이집트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에서 왕들의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중 하나였다. 대표적인 네크로폴리스인 사카라(Saqqara)에서도 기자의 피라미드가 보인다.임호테프가 사카라에 고왕국 제3왕조의 두 번째 왕 조세르(Djoser: BC 2686~ BC 2667)의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를 만든 이후 너도나도 피라미드
멤피스를 수도로 삼았던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 死者의 도시) 중 가장 가까운 곳이 멤피스박물관에서 서쪽으로 약 2㎞쯤 떨어진 사카라(Saqqara)다. 사카라는 남북으로 6㎞, 동서로 1.5㎞나 되는 넓은 지역인데, 이곳에서는 현재까지 1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고, 현재도 발굴을 계속하고 있다. 사카라에서는 고왕국 제3왕조(BC 2650~2575)의 두 번째 왕 조세르(Djoser: BC 2630~2611)의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가 가장 유명한데, 계단 피라미드는 1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는 폐허가 되어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없고, 오로지 당시 왕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인들은 오래전부터 이집트인들은 오래전부터 태양신을 믿고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생명의 방향으로 여기고, 태양이 지는 서쪽을 죽음의 세계, 악신의 세계라고 믿었다. 고왕국 시대에는 파라오를 ‘태양신의 대리자’라 하여 신격화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많이 만들었지만, 현실의 궁전은 나무나 흙벽돌 등으로 가볍게 지어서 왕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나일강 서안에 조성한 왕들의 공동묘지 네크로폴리스(Necrop
이집트는 BC 3100년경부터 30여 왕조가 나타나다가 BC 2925년경에 메네스(Menes) 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여 카이로 남쪽 약 25㎞ 떨어진 멤피스(Memphis)에 수도를 정하고 고왕국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멤피스는 훗날 그리스식 지명이고, 당시에는 이네브 헤지(Aneb-Hetch), 중왕국 시대에는 앙크타위(Ankh Taui)라고 불렀다. 이것은 ‘두 땅의 생명’이라는 의미로서 멤피스가 상·하 이집트의 중간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개방적인 하이집트인과 보수적인 상이집트인 간의 언어·생활 습관 등의
BC 5000년경 나일강 문명으로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Egypt)는 BC 3100년경부터 30여 왕조가 나타나다가 BC 2925년경 메네스왕(Menes)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여 카이로 남쪽 약 25㎞ 떨어진 멤피스(Memphis)에 수도를 정하고 고왕국 시대를 열었다. BC 2050년경에는 멘투호테프 2세(재위 BC 2060~2009)가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여 중부 지방인 테베(지금의 룩소르)에 중왕국 시대를 열고, 신왕국 시대에는 남쪽으로 리비아, 동쪽으로 레반트까지 진출하여 역대 가장 넓은 영토로서
지중해(Mediterranean Sea)는 오랫동안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삼 대륙 사이에서 문물을 교류하고 서로 싸우면서 역사를 이룬 ‘지구의 한가운데’였다. 지중해는 동쪽에서 대서양과 만나는 서쪽 지브롤터 해협까지 4100㎞나 되는 거대한 바다인데, 가장 큰 섬인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동·서지중해로 나눈다. 동지중해는, 이탈리아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의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로 나누는데, 십자군 전쟁 이후 베네치아는 ‘베네치아의 동쪽 지역’인 동지중해만 오가면서 무역했다. 이 지역을 레반트(Levant)라고 하고,
부르사에는 오스만 제국의 첫 수도답게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많다. 그중에서 1421년 바예지트 1세 때 건축된 울루 자미(Ulu Camii)가 가장 크고 아름답다. 오스만 제국은 152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고,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세운 거대한 성 소피아 대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고, 그 옆에 오스만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는 대규모 블루 모스크를 건축했지만, 부르사가 수도였던 시대에는 그런 대규모 건축 기술이 없어서였는지 똑같은 20개의 돔을 연결하고 2개의 첨탑을 세운 형태였
튀르키예의 북서쪽 마르마라해 연안에 있는 부르사(Bursa)는 부르사주의 주도(州都)이자,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르에 이어 튀르키예 제4의 대도시다, 주 전체 인구는 약 300만 명 중 부르사시에만 190만 명이 살고 있다. 부르사란 지명은 도시의 실질적인 창건자인 비티니아 왕국의 군주 프루시아스 1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의 요청으로 벌어진 십자군 전쟁 중 1204년 제4차 전쟁 때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유혹으로 목적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트로이 유적지에서 약 800m쯤 떨어진 곳에 2018년 8월에 개관한 트로이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에서 발굴한 유물을 독일로 반출하여 베를린 국립박물관에 소장·전시하다가 2차 대전 때 구소련이 탈취하여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에 전시하고,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 미술관으로 모두 옮겨서 전시하는 등 전 세계로 반출된 트로이 유물을 모두 환수하여 전시하겠다는 의지로 건립했다고 한다. 박물관은 4층 건물로서 건물 외관을 붉게 녹슨 사각형 큐브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가 10년에 걸쳐 벌인 트로이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BC 13세기에 벌어졌던 전쟁을 500여 년이나 지난 BC 8세기에 호메로스가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에서 소개했는데, 그에 의하면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메넬라오스 왕의 왕비 헬레네(Helene)를 데리고 달아나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 왕은 형이자 그리스 최강국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에게 호소하여 벌어졌다. 그렇지만, 트로이 전쟁은 어떤 역사 기록도 없어서 호메로스의 창작인지, 역사적 사실인지
튀르키예의 남서부 에게해 연안에서 가장 큰 도시 데니즐리(Denizli)는 데니즐리주의 주도(州都)로서 약 65만 명이 살고 있다. 셀주크 제국 시대의 사원과 분묘들이 있는 고대도시인 데니즐리 북쪽으로 약 20㎞쯤 떨어진 곳에 온천으로 유명한 파묵칼레(Pamukkale)가 있다. 튀르키예어로 파묵(pamuk)은 목화(木花), 칼레(kale)는 성(城)인데, 파묵칼레는 1만 4000년 전부터 멘데레스 계곡의 지질변화로 분출된 석회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내리면서 하얀 결정체가 거대한 암벽을 뒤덮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목화로 만든
켈수스 도서관 앞에 개선문처럼 세워진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을 지나 고대 에페소 의회 건물이 있는 북문까지 약 500m가량 완만하게 이어진 경사진 도로가 ‘크레디아 거리(사제의 거리)’다. 크레디아 거리는 고대 도시 에페소의 행정과 종교시설이 있던 거리여서 크레디아(사제)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은 대리석 거리와 크레디아 거리를 구분한다. 크레디아 거리는 왼편으로 약간 구부러졌고, 대리석이 아닌 경복궁 근정전 마당처럼 넓고 평평한 돌로 포장된 도로가 약 500m가량 이어진다.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고대 도시 에페소는 30만 명이 거주하는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이자 129년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때 ‘로마제국의 5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여 소아시아를 통치하는 총독이 주재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의 쇠퇴, 262년 고트족의 침략, 대지진으로 폐허로 변해서 오랫동안 잊혔다가 1858년 영국의 고고학자인 우드(J.T.Wood)가 대영박물관의 후원을 받아 1859년 원형극장과 아르테미스 신전을 처음 발굴했다. 출토물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가서 지금까지 튀르키예로부터 문화재 반환 요구로 갈등을 빚고 있다. 1895년에는 오스트리아
튀르키예의 남서쪽에 있는 고대도시 에페소(Efes)는 기원전 1044년경 고대 그리스인이 건설한 도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의 왕 코드로스(Codrus)의 아들 안드로클로스(Androclus)가 ‘멧돼지와 물고기를 만나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라’라는 신탁을 받고, 그곳을 찾아 헤매던 중 물고기를 잡아서 구워 먹으려고 불을 피웠을 때 에게해의 거센 바람이 불면서 불똥이 숲으로 튀어 불이 번졌다. 그때 숲에 숨어있던 멧돼지가 놀라서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도시를 건설한 것이 에페소라고 한다. 그리스 이후 헬레니즘, 로마, 이슬람
약 6000만 년 전 에르지예스 산(Erciyes Mt.: 3917m)의 대규모 화산 폭발로 분출된 용암과 화산의 화산재가 굳어지면서 파샤바 계곡(Pasabag)을 비롯하여 데린쿠유(Derinkuyu), 피존 홀(Pigeon Hole) 등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카파도키아는 동서 400㎞(서울역~부산역 398㎞), 남북으로 250㎞(인천~강릉 243㎞)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어서 하루나 이틀 사이에 모든 지역을 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패키지여행은 대개 괴레메, 파사뱌 계곡, 피존 홀, 데린쿠유 등을 주마간산식으로 돌아보는 것이지만,
앙카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20㎞ 떨어진 고원지대인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1960년대부터 기암괴석으로 알려져서 튀르키예의 ‘괴레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1985년에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셰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카파도키아란 페르시아어 '카트파두카(Kat-patuka)'에서 유래한 말로서 '좋은 말들의 땅'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에서도 중앙 지역인 카파도키아는 해발고도 800∼1200m인 분지형 고원지대이다.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져서 아르메니아(Armenia) 고원으로
앙카라에서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내륙의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가는 도중에 소금호수 투즈괼(Tuz Gőlȕ)을 들렀다. 소금호수는 앙카라에서 약 150㎞ 떨어진 고속도로휴게소 주변인데, 튀르키예어로 ‘투즈’는 소금이고. ‘괼’은 호수라는 의미다. 아나톨리아 지방은 지중해. 마라 말라 해. 흑해 등으로 둘러싸인 반도였으나, 지각변동으로 융기되어 호수가 된 지역이 많다. 또, 아시아 지역은 지질 구조상 암염(巖鹽)이 적어서 대개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만들었지만, 유럽은 암염이 많아서 소금호수도 많다.투즈괼은 튀르키예에서 남북
앙카라 시내 중심지인 앙카라 중앙역(Ankra Gari)에서 도보로 약 5분쯤 떨어진 곳에 한국 공원(Ankara Kore Parkı)이 있다. 한국 공원은 1971년 8월 서울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앙카라시가 부지 1만㎡(약 3000평)를 제공하고, 서울시가 이곳에 6·25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목숨을 바친 튀르키예군 희생자들을 기리는 공원을 조성하여 1973년 11월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50주년에 맞춰 앙카라시에 헌정한 것이다.튀르키예는 6·25때 UN 16개국 중 미국, 캐나다, 영국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1만 500
앙카라 구시가지에는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1831~1938)의 영묘(靈廟)가 있다. 영묘란 고인의 육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여 보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인을 기리는 사당 개념이 포함된 무덤 건축물로서 능묘(陵墓)라고도 하는데, 우리의 국립현충원도 영묘에 속한다. 뉴욕의 조지 워싱턴을 비롯하여 대만의 국부 쑨원, 베트남의 호찌민 등 근래에 독립하거나 건국한 나라들은 대개 건국의 아버지를 위한 기념관을 짓고 있지만, 튀르키예에서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의 존경은 신(神)을 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