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의례의 광장

앙카라 구시가지에는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1831~1938)의 영묘(靈廟)가 있다. 영묘란 고인의 육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여 보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인을 기리는 사당 개념이 포함된 무덤 건축물로서 능묘(陵墓)라고도 하는데, 우리의 국립현충원도 영묘에 속한다. 뉴욕의 조지 워싱턴을 비롯하여 대만의 국부 쑨원, 베트남의 호찌민 등 근래에 독립하거나 건국한 나라들은 대개 건국의 아버지를 위한 기념관을 짓고 있지만, 튀르키예에서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의 존경은 신(神)을 숭배하는 것에 비교될 정도이다. 형법상 아타튀르크에 대한 모독죄를 규정하고 있는가 하면, 모든 관공서는 물론 가정마다 그의 사진이나 어록을 벽에 걸어둔다. 전국의 도시마다 가장 큰 대로마다 아타튀르크 대로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원이나 주요 도시의 거리에는 그의 청동 기마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는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에서 57세로 죽었는데,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 그가 죽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사이렌이 울리고, 달리던 모든 차와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기리는 묵념한다. 그는 1923년 10월 초대 대통령이 됐는데, 1934년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란 경칭을 수여했다. ‘아타’는 아버지, ‘튀르크’는 터키의 의미로서,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최고의 찬사이다.

사자의 길
사자의 길

그의 영묘는 그의 사후에 9년에 걸쳐 1953년에 조성됐지만, 2002년 더욱 거대한 성역으로 확장됐다. 튀르키예의 군인들은 반드시 가장 먼저 아타튀르크 영묘를 참배하도록 규정됐다고 한다. 아타튀르크 영묘는 연중무휴 개장하고, 입장료도 무료다.

아타튀르크 석관
아타튀르크 석관

정문에서 영묘까지 완만한 언덕길로 올라가는 폭 30m, 길이 400m의 대리석 포장길 양쪽에는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400여 년 동안 강성했던 히타이트의 상징인 사자 24마리를 새겨서 ‘사자의 길’이라고 한다. 정문에서 본관까지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어서 노약자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의례의 광장으로 오르기 직전 왼편에 남성 세 명, 오른쪽은 여성 세 명의 입상이 있는데, 남성들은 각각 학자, 남자 군인, 농부이고, 여성들은 각각 학자, 여군, 농부의 아내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이슬람을 믿어온 튀르키예에서 남녀 평등과 함께 국민통합으로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이슬람과의 단절로 국교 폐지, 정치와 종교의 분리, 남녀 평등 등을 주장한 그의 개혁 정책은 이슬람 강경파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전 국민의 90% 이상이 모슬렘이다.

국기 게양대
국기 게양대

‘사자의 길’에서 본관 건물이 회랑(回廊)이 사각형으로 둘러싸여 있는 ‘의례의 광장’은 1만 5000여 명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인데, 국가의 주요 행사와 기념식 거행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의례의 광장’은 국기 게양대를 사이로 두 개의 건물이 나란히 있고, 국기 게양대 앞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근위병 교대식이 벌어진다.

추모관의 병사
추모관의 병사

열주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안뜰의 각 모퉁이에 있는 탑은 각각 평화, 승리, 혁명, 공화국을 상징한다. 국가 게양대 오른쪽 야트막한 언덕을 ‘전망의 언덕’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아타튀르크의 영묘가 있다. 본관의 추모관을 ‘명예의 전당(Hall of Honor)’이라고 하는데, 건물은 마치 베트남을 통일한 하노이의 호찌민 기념관을 연상시킨다. 건물의 돌기둥이 통일되지 않고 매우 거칠고 투박한 것은 튀르키예인들의 국민 통합과 아타튀르크에 대한 정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석재들을 모아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아타튀르크는 매우 검소해서 사후에 일반 시민들처럼 공동묘지에 매장되기를 원했지만, 그의 전우이자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이스메트 이뇌뉘(İsmet İnönü: 1884~1973)가 아타튀르크의 영묘를 대대적으로 조성하여 1953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사실 베트남의 호찌민도 자기의 유해는 화장해서 강에 뿌려주고, 생가는 대중에게 공개된 쉼터로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사후에 생가는 박물관이 되고 유해는 거대한 영묘를 지어서 참배하고 있다.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 석관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 석관

추모관으로 들어가는 문 양쪽 벽면에는 아타튀르크의 연설에서 발췌한 ‘공화국 선포문’이 새겨 있다. 추모관은 대리석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고, 아타튀르크의 석관(石棺)은 지하 1층에 있다. 계단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한 가운데에 유해가 안치된 방이 있고, 그 주위에는 여러 개의 기념비와 조각상이 있다. 이곳을 아타튀르크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첫 번째 전시실에는 1919~1923년 독립전쟁 당시 주요 전투를 그린 기록화와 공화국 건국 후 주요 사회 개혁을 설명하는 게시판 등이 있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아타튀르크의 개인 소지품, 의복, 가구며, 연설문과 문서, 역사적 사진 자료, 각국에서 받은 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명예의 전당
명예의 전당

1차 대전 때 오스만제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서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동맹(三國同盟)과 싸웠으나 패했다. 당시 사단장이던 아타튀르크만이 유일하게 이스탄불의 서쪽 갈리폴리 전투(Gallipoli campaign)에서 1만 4000명의 군사로 영불연합군 20만 명을 격퇴하여 일약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영국과 호주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대패한 4월 25일을 앤잭 데이(ANZAC Day: Australian & New Zealand Army Corps)이라 하여 현충일로 삼을 정도였고, 이때부터 그는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이름보다는 ‘케말 파샤’로 더 많이 불렸다. 연합군이 수도 이스탄불에 진주하자 국민은 국가 존립에 대한 위기감과 민족주의 정신이 커지자, 케말 파샤는 오스만제국이 점령했던 영토는 포기하더라도 튀르키예 고유 영토만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 아래 독립전쟁을 전개한 끝에 1923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연합국으로부터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았다.

갈리폴리 전투
갈리폴리 전투

국기 게양대 옆쪽으로는 회랑을 따라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과 업적, 독립전쟁 이후의 튀르키예 공화국 역사를 다룬 박물관이 있고, 아타튀르크 추모관의 남쪽에는 두 번째 대통령이었다가 죽은 이스메트 이뇌뉘의 영묘도 있다. 일제강점기 36년과 해방, 그리고 6‧25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른 우리에게 그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없다는 현실에 아쉬움이 크다.

독립전쟁 당시 기마상
독립전쟁 당시 기마상
독립운동 부조물
독립운동 부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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