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에페소 유적 약도

고대 도시 에페소는 30만 명이 거주하는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이자 129년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때 ‘로마제국의 5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여 소아시아를 통치하는 총독이 주재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의 쇠퇴, 262년 고트족의 침략, 대지진으로 폐허로 변해서 오랫동안 잊혔다가 1858년 영국의 고고학자인 우드(J.T.Wood)가 대영박물관의 후원을 받아 1859년 원형극장과 아르테미스 신전을 처음 발굴했다. 출토물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가서 지금까지 튀르키예로부터 문화재 반환 요구로 갈등을 빚고 있다. 1895년에는 오스트리아 고고학회의 후원으로 에페소 유적에서 아고라(Agora)와 켈수스 도서관 등을 발굴했다.

원형경기장
원형경기장

고대 에페소 유적은 현재의 에페소 시내에서 피온산 너머 약 1.5㎞가량 떨어졌는데,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켈수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신전 등 현존하는 로마는 물론, 폼페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 고대 로마 도시 중 가장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여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메제우스문
메제우스문

피온산 동쪽으로 우회해서 찾아가는 에페소 유적지는 남문과 북문 두 곳의 매표소가 있는데, 북문 매표소가 정문이다. 이곳은 버스 종점이자 택시 정류장이어서 항상 많은 관광객이 몰려서 패키지여행일 때는 대형버스가 복잡한 정문을 피해서 남문 매표소 앞에서 하차시킨 뒤 약속된 시간에 정문으로 이동하여 여행객을 태우고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자유여행이라면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40유로다. 에페소 유적지는 나무 그늘이나 휴식을 취할만한 공간이 없이 온통 대리석 바닥과 건물이어서 파라솔이나 우산, 챙이 넓은 모자, 수건, 음료수 등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화장실조차 양쪽 매표소 부근에만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아케이드 거리
아케이드 거리

정문인 북쪽 매표소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가면, 오른편은 에페소 항구로 통하는 길이고, 왼편은 에페소 유적지로 가는 삼거리이다. 항구로 통하는 아케이드 거리(Arcade Street)는 아르카디우스 황제 때 조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거리명인데, 수많은 상점과 공방이 즐비한 상점가였다. 원형경기장 입구에서 켈수스 도서관 앞까지의 대리석 거리(Marble Street)는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포장된 쭉 뻗은 길은 에페소의 메인스트리트다. 2000년 전에 대리석으로 도로를 포장하고 아름다운 문양까지 그린 대리석 거리 양쪽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했던 곳이다. 또, 켈수스 도서관과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Gate of Mazeus & Mithridates)은 대리석 거리와 남문 매표소 부근인 의회가 있는 곳까지의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데, 쿠레테스 거리는 대리석 거리보다 약간 좁다. 쿠라테스 거리 양쪽으로는 공공건물과 시장이 있었다.

유곽거리
유곽거리

에페소 항구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인 삼거리에서 왼편 산 중턱에 있는 원형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조성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유적은 1~2세기 로마제국 시대에 만든 것이다. 즉, 37년 폭군 칼리굴라(Caligula)가 근위대에게 살해된 후 오른쪽 다리가 소아마비로 장애인이었던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Claudius: 37~41)가 근위대의 강권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클라우디우스 때 착공하여 네로 황제(Nero: 54~68) 때 완성됐다. 원형극장은 로마의 대도시에 건설한 야외극장과 마찬가지로 산기슭 경사지에 부채꼴로 만들었는데, 2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중앙무대를 향하여 3단 22계단으로 계단식 좌석을 만들고, 18m 높이의 중앙무대에서는 연극 공연이나 각종 경기를 벌였는데, 지금도 매년 여름 이곳에서는 그리스 고전극을 상영한다고 한다. 운동장 밑에는 항아리를 묻어서 마이크가 없어도 소리가 멀리까지 크게 울리게 하는 독특한 기술로 건설됐다.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에는 기독교인들을 몰아넣고 사자와 경기를 벌이기도 했는데, 원형극장은 로마는 대체로 인구의 1/10 규모로 경기장을 지어서 에페소의 인구를 25만~3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리석 거리의 오른쪽은 광장 아고라(Agora)인데, 이 일대를 대리석으로 포장하여 조성한 것은 아고라 주변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한 점이 있다. 하지만, 넓은 아고라에는 에페소의 영광을 말해주듯 코린트 양식의 돌기둥들만 서 있다.

켈수스 도서관 입구의 4여신상
켈수스 도서관 입구의 4여신상
켈수스 도서관
켈수스 도서관

켈수스 도서관은 소아시아 총독이던 켈수스의 아들이자 로마 원로원 의원 율리우스 켈수스가 135년 부친의 업적을 기리며 세운 것이다. 그는 지하에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고, 무덤 위에 1층은 이오니아식, 2층은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8개씩 세운 2층 도서관을 세웠는데, 도서관은 두루마리형 파피루스와 양피지로 만든 책 1만 2000권을 소장하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로마의 3대 도서관’이었다고 한다. 도서관의 세 개의 출입문에는 1970년 오스트리아 발굴팀이 복원한 지혜, 미덕, 지성, 지식을 상징하는 4명의 여신상이 있는데, 여신상의 진본은 오스트리아의 ‘에페소 박물관’에 소장 중이고, 도서관 앞에 세워진 여신상은 복제품이다. 오스트리아의 발굴팀이 파편을 모아서 복원한 켈수스 도서관은 정면 일부에 불과했지만, 건축양식과 공간 배치가 아름다워서 에페소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공중화장실
공중화장실

그런데, 켈수스 도서관 길 건너 맞은편에는 귀족들을 위한 화장실과 사창가, 공중목욕탕 등이 있다. 사창가와 공중목욕탕 사이에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50명이 동시에 용변을 볼 수 있는 변기는 가림막도 없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마치 요즘의 베이징의 공중화장실 모습인데, 변기 아래에 홈통처럼 흐르는 물은 목욕탕의 생활하수를 흘려보내서 수세식으로 설계했다는 점이 놀랍다.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은 1세기경에 지었던 3층 목욕탕이 지진으로 무너지자, 4세기경 독실한 기독교인 스콜라스티카가 재건하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 도시 번화가에 사창가가 있다는 것은 당시 매춘이 공인됐음을 알게 하는데, 도로에서는 물론 켈수스 도서관과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 밑에 사창가로 가는 지하도가 있다. 사창가로 들어가는 골목도 대리석 포장도로인데, ‘발자국’ 홈이 파진 대리석은 발자국보다 큰 발을 가진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고 한다. 또, 공중목욕탕과 사창가 쪽에 다산의 상징으로 유방이 20여 개나 되는 이오니아 지방의 여신 아르테미스 상도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진본은 에페소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이고, 이곳에는 복제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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