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 위원장

<정년 퇴직을 앞두고>

새해, 시무식을 마친 오후에 전자우편 2통을 받았다. 내가 다니는 연구소 행정부서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인재개발실에서는 정년 퇴직 절차를 안내하면서 첨부한 서류들을 작성하여 1월 12일까지 제출해 달라고 했다. 문화경영실에서는 정년 퇴임식 행사 일정을 안내하고 혹시 원하면 후배들에게 남기는 글을 써달라고 했다. 나에게도 드디어 퇴직이 다가온 것이다.

1989년 2월에 연구소에 입사했다. 그때 연구소는 서울 홍릉에 있었고 다음해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했다. 입사할 때만 하더라도 일년쯤 다니고 나서 모교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입사 한달 만에 지도교수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자 포기했다. 몇년 지나서 다른 대학에 진학했지만 나를 부위원장으로 지명한 노조 위원장께서 출근길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논문쓰기를 미루고 노조 일에 매달려야 했다.

“위 본인은 정년으로 인하여 2024년 2월 6일 부로 사직고자 합니다.” 연구소가 생긴 이래 한 번도 바뀌지 않았을 사직원의 본문 내용은 간결했다. 소속 부서, 직위, 이름, 임용일과 현 고용 계약일, 그리고 부서장들 이름은 이미 채워져 있다. 내 이름이 적힌 오른쪽 여백에 직접 서명해서 제출하면 센터장, 부장 등 결재선을 따라 서명이나 도장을 찍을 것이다. 절차가 아주 간단하다.

사직원만 써내고 끝날 일은 아니다. 퇴직자 진술서와 서약서를 써서 첨부해야 한다. 퇴직자 진술서를 보니 연구소 운영이나 급여, 복지 등에 관한 의견이 있는지, 개선을 위한 건의 사항이 있는지 묻고 있다. 담당 업무, 교육훈련, 급여나 복지 후생에 관해서는 특별한 의견이 없다고 했다. 승진 기회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승진 누락이 없기를 바란다고 썼다.

전체적인 개선을 위한 건의 사항이 있느냐고 묻기에, 노동조합이 단체교섭으로 개선하라고 요구하기 전이라도 연구원 측에서 좋은 제도 개선 방안을 적극 마련하고 시행하면 좋겠다고 답했다. 연구소 다니면서, 노동조합을 하면서, 늘 아쉽고 안타까웠던 것이 정부나 사용자들이나 좋은 제도를 먼저 만들려 하지 않고 누군가 요구하고 투쟁해야 마지못해 받아들이곤 하는 문제였다.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

퇴직자 서약서는 내용이 다소 묵직하다.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국가안보 등에 관한 제반 비밀, 과학기술 정보 등 중요 사항을 일절 누설하거나 도용하지 않겠다고 서약해야 한다. 연구자료와 연구결과 보고서 인계 인수, 퇴직후 논문 발표나 특허 출원할 경우 절차와 권리 등에 관해서도 잘 지키겠다고 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처벌도 감수해야 하지만, 나는 연구보다 정부 과학기술정책과 노동 정책 대응에 더 치중했으므로 거리낄 것이 별로 없다.

지난 35년 세월 동안 무수한 만남과 이별을 겪었다. 직장을 옮긴 사람들이야 이따금 만날 수도 있었지만,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아직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한다. 사무실에 쌓아놨던 해묵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마흔 두 살에 사고로 떠난 노조 위원장을 추모하는 글을 발견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드리운 낚싯대에 걸려 오늘도 노조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울먹이던 그 옛날 내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지난 주, 정년 퇴직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제출했다.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퇴직은 안락한 노후의 시작이 아니라 다시금 생존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첫걸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 압도적 세계 1위, 노인 자살률 1위라는 오명에서 차지하는 내 또래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지금껏 살아온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약육강식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작은 힘이라도 보태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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