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대 교목

하루의 일상을 되짚어 보면 온통 보기와 보여주기로 채워져 있다. 일하는 시간은 언제나 노트북 사용 시간과 같고 한눈파는 시간마저 휴대폰이나 TV, 책이나 신문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일의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보기는 보여주기를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하다. 이처럼 보기와 보여주기가 섞이며 하루의 기억을 만들어 내고 그 비율의 차이와 접점을 조율하며 성숙한 삶으로 나아간다.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보기와 보여주기는 관계의 우열을 형성한다.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우위에 있음을 뜻한다. 특별히 감춰지고 가려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특권에 해당하며 이는 소수에게만 허락된다. 더욱이 자기를 노출하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권력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있고 올려다봐야 한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투쟁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보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감춰진 것을 볼 수 있는 힘은 사실 보여주기를 통해 얻은 산물이다. 시민의 공감과 대중의 지지로 얻어진 것이기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과 부담이 뒤따른다. 그래서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자리는 보여줘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대중의 기대는 그동안 보여주기를 토대로 형성된 것이기에 그 이상의 내용을 원한다. 다행히 보여줄 것이 많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자리는 위태롭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때 쉽게 빠지는 함정이 바로 가면이다. 가면은 더 이상 보여줄 내용이 없을 때 하는 선택이지만 매우 위험하다.

수많은 거짓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환상을 주고, 사람들은 또다시 열광하지만 그럴수록 가면은 두꺼워진다. 보여주기가 과도하면 가면 뒤에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구호가 요란할수록 변명은 늘어나고 증명할 것이 많아지는 법이다. 지나치면 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집단의 혼란이나 정서적 불안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보여주기는 대부분 과장과 환상으로 이뤄졌지만, 대중은 여전히 보기를 원한다. 개인은 가질 수 없지만, 집단적 우위에서 힘을 행사하고픈 본능이 볼거리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사적 영역이고, 사적 영역이 드러나는 것은 대개 엿보기를 통해 이뤄진다. 몰래카메라나 녹취파일이 공개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논란이 되는 것은 가면이 두꺼운 사람들의 숨겨진 진실이기 때문이다.

방송의 인기 프로그램은 대체로 엿보기의 확장이다. 카메라는 인기와 관심을 토대로 대상을 발탁하고 은밀한(실제로는 공개적인) 엿보기를 시현한다. 대체로 이들은 드러내고 알리는 행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에 보여주기는 피할 수 없는 사명과도 같다. 보여주기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집착하기 쉽지만 그럴수록 영혼의 갈증은 비례한다.

대중은 공적 개인의 사적 영역을 훔쳐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에서도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갈구하는 일종의 교감인 셈이다.

문제는 그것이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심리적 박탈감과 위화감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높은 곳에 있고, 일반적으로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건강한 보기를 통한 진실한 보여주기가 아쉬운 지점이다.

심리학 용어로 트루먼쇼 증후군(Truman Show Delusion)이란 것이 있다. 영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년 개봉)에서 비롯된 이 말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나타나는 심리적 증후군을 뜻한다.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며 망상에 빠지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타인의 관심과 세간의 주목,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두려움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도를 넘는 보기와 보여주기가 병든 사회를 양산하고 있다. 보이고 싶지 않은 사적 영역이 공개되면서 수치와 분노를 양산하고, 개인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부풀려졌을 때 상황은 늘 비극으로 끝이 난다. 우리 사회 수많은 비극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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