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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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개 식용 금지법 국회 가결로 수십 년 논란의 개고기 문화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러나 3년간의 유예기간에 벌어질 일에 대한 논란까지는 씻어내지 못했다. 공격적인 이슈 중 하나가 집단 사육 중인 개들의 처분 방식이다. 생사여탈권을 쥔 농장주들은 개를 판매하거나 입양해야 하는데 대규모 도살 가능성이 크다며 동물보호단체를 중심으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시위가 연잇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서 식용견이라는 적절치 못한 표현이 여과 없이 쓰이고 있어 유감스럽다.

식용견은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출처 불분명의 명사다. 의미인즉 먹기 위해 길러지는 개, 또는 먹어도 괜찮은 개 정도로 풀 수 있다. 언제부터 통용됐는지 알 수 없으나 다분히 개고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름으로 사량된다. 입에 자주 오르내린 건 최근이다. 개 식용 금지법에 반대하는 대한육견협회가 사용했고 정부와 동물보호단체가 인용하며 농장에서 사육하는 개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의사 전달력에선 단순 명쾌할지 몰라도 의미상은 불편하다. 반려견을 키우면서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 중 먹는 개는 따로 있다고 우기는 철학, 딱 그 짝이다. 공공연한 기호 식품 섭취를 나무랄 생각은 없으나 인정하기엔 너무 차별적인 철학이다. 멍첨지 사회에 계급이 있는 건 안다. 반려견이라는 이름으로 대접받고 보호받는 개와 속칭 ‘똥개’ 팔자로 태어난 개의 클래스 차이 말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생명엔 귀천이 없는 법이거늘 식용견은 너무 갔다.

핵가족화와 맞물려 우리 사회의 동물 사랑은 갈수록 극진해지고 있다.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이라는 뜻의 애완동물이 죽은 말이 되고 그 자리를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라는 뜻의 반려동물이 대신할 정도다. 반려견이 대표적이다. 이런 마당에 식용견은 개는 개이되 가족처럼 키우는 개가 아닌 몸보신용이라는 낙인처럼 비친다.

이 같은 문제 제기와 개선의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2019년 국제동물보호단체인 휴메인소사이어티인터내셔널은 식용견을 대체할 이름으로 ‘누리개’를 선정하고 식용견 인식 개선 캠페인을 전개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 세상을 누리라’는 염원의 누리개는 보편화되지 못했고 식용견으로 치부되는 개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반려견이 될 수 있다는 바람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동물보호단체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지양해야 한다는 데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한 동물보호단체 관계자는 단체 간 논의를 지속해 대신할 수 있는 표현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명칭이 바뀐다고 처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나 어쩐지 그렇게라도 포장해 주는 게 멸종을 앞둔 한 부류의 견생에 대한 도리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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