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최근 연거푸 두어 권의 심리학 관련 책을 읽었다. 하나같은 주제는 ‘누구나 겪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무의식중에 기억에 남아 인격 형성에 영향을 주고, 성인이 된 후의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라는 내용이었다. 심리학의 최고봉으로 지목되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기반으로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공감과 깨달음을 경험했다. 우선은 나를 주인공으로 두고 그 이론에 대입해 보고 과연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집필한 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에 경험해 마음 깊이 묻어둔 상처를 찾아내 치유해야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고, 앞으로 삶도 자신감 속에 살아갈 거라고 충고했다. 숨겨둔 상처의 정도가 심하면 전문가를 만나 치유 상담을 받으라는 조언도 전했다.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각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저자들이 주장한 이론에는 깊이 공감했다.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는 이유를 알고 나니 한결 마음이 후련했다.

한편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역사 속 인물을 한 명씩 떠올렸다. 그중에도 가장 인상 깊이 떠오른 인물은 조선 국왕을 지냈지만, 너무도 대조적인 두 인물인 연산군과 정조였다. 둘은 어린 시절 정치적 이유로 친모와 친부를 잃는 아주 큰 상처를 입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나 아버지를 잃은 그들은 유년기와 청년기는 물론 성인이 돼서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한 정신적 압박 속에 살아야 했다.

1476년생인 연산군 이융은 그가 6살이던 1482년, 생모가 아버지인 성종으로부터 사약(賜藥) 형을 받아 죽는 일을 경험했다. 그는 국왕에 즉위한 후 1504년 갑자사화 때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전모를 알아내고 광인으로 변모했다.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잔혹한 ‘피의 복수’가 그의 재위 중 이어졌다. 그는 500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잔인하고 패륜을 저지른 군왕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752년생인 정조 이산은 그가 10살 되던 해인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걸 직접 목격했다. 어린 정조가 가슴에 품었을 두려움과 상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그는 군왕으로 즉위한 후, 그 상처를 깊이 묻어둔 채 ‘피의 복수’를 하지 않았다. 극소수에게만 칼을 겨누었다. 그 끔찍한 일을 겪고도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우리 역사에서 손꼽는 성군이 되어 존경받는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비슷한 어린 시절의 큰 상처를 경험했지만, 두 인물이 보인 행보는 극과 극이었다. 한 명은 최악의 군왕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다른 한 명은 성군의 반열에 올랐다. 연산군은 피의 복수에 만족하지 않고, 인륜을 저버린 패악질로 온 백성을 괴롭혔다. 반면 정조는 정사에 몰입해 개혁 군주로의 과감한 행보를 이어갔다. 그 덕에 후대인들은 정조를 세종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군왕으로 손꼽는다.

상처는 크고 작음이 있을 뿐이고, 저마다 새기는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가슴에 묻고 산다. 모든 사람은 어린 시절 무의식 또는 의식 중에 경험한 상처를 평생 간직하고 산다는 학설에 공감한다. 내 어린 시절을 되짚어보니 그 이론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연산군은 광기로 표출했고, 정조는 백성을 향한 선정(善政)과 어머니에 대한 효로 승화하는 초인적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깊은 상처를 씻어내지 못해 남들은 상상도 못 할 깊은 아픔 속에 살았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정조는 위대하다.

책을 읽고 어린 시절의 내 아픔과 상처를 찾아냈다. 그 상처를 알고 나니 내가 가엾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중요한 건 표출되지 않지만 내 내면에 깊은 상처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고, 언젠가 이 상처를 치유해야 앞으로 남은 생을 건강히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은 거다. 성숙한 치유의 방법은 정조가 가르쳐 주었다. 할 수 있을까? 내가 정조처럼 할 수 있을까? 정조 이산, 그가 참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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