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서울의 봄 
사진=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의 흥행에 힘입어 故 정선엽 병장의 의로운 죽음이 재조명됐다.

故 정선엽 병장은 12.12 군사 반란 당시 서울 용산 국방부 B-2 벙커에서 국방부를 점령하려는 신군부 세력에 맞서 끝까지 벙커를 지키다 숨졌다.

고인은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서울의봄'에서 전두광 군사반란군에 맞서 육군 본부 벙커를 지키다 전사한 조민범 병장의 실존인물이다.

정 병장은 지난 1956년 영암군 금정면 안노리에서 태어나 금정북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광주 동신고등학교를 거쳐 조선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다음, 서울 용산 국방부를 지키는 헌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정 병장이 제대를 석 달 앞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 신군부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13일 새벽 신군부 주요 인물인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지휘하는 공수부대 병력이 국방부를 점령하려고 몰려온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반란군의 “비키라”는 명령에 거부하다 총격을 맞아 쓰러졌다. 

▲ 정선엽 병장
▲ 정선엽 병장

정 병장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난 2022년 전까지는 ‘순직’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는 국방부가 "정 병장은 1979년 12월. 13일 새벽 1시40분께 국방부 B-2 벙커 경계근무 중, 계엄군 증가 인원과의 오인에 의한 총기사고로 통합병원 응급실에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결론냈기 때문이다.

1공수여단이 기록한 당일 작전일지에는 “1979년 12월 13일 새벽 2시10분께 1공수여단 병력이 상부의 벙커 돌격을 지시에 따라 벙커 출입구에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은 체포하고,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해 사살됨”이라고 기록돼 있다.

군 인사법 상 ‘전사자’는 ‘적과의 교전 또는 무장 폭동·반란 등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 ‘순직자’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정선엽 병장은 부당하게 군인사법 상 교육훈련 중 사망한 ‘순직자’로 분류됐다. 43년 동안 정 병장은 전두환의 반란군에 대항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인에게는 불명예, 가족에게는 한, 사회적으로는 공분을 일으키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7일 전사 재심사에서 정선엽 병장을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결정,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43년 만에 최소한의 명예를 회복했다.

사진= 연합뉴스(12일 오후 광주 북구 동신고등학교에서 열린 고(故) 정선엽 병장 44주년 추모식에서 고인의 동생 정규상씨가 추모하고 있다. 정 병장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79년 12월 13일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연결하는 지하 벙커에서 1공수여단 소속 반란군의 총탄에 숨졌다)
사진= 연합뉴스(12일 오후 광주 북구 동신고등학교에서 열린 고(故) 정선엽 병장 44주년 추모식에서 고인의 동생 정규상씨가 추모하고 있다. 정 병장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79년 12월 13일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연결하는 지하 벙커에서 1공수여단 소속 반란군의 총탄에 숨졌다)

영암군은 관계자는 “정선엽 병장 추모행사와 함께 ‘내 고장 영웅찾기 사업’을 지속 추진해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그 유족이 명예와 자긍심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예우를 강화하겠다”고 전했다.

또 지난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202단독은 지난 5일 정부가 유족 4명에게 각각 2천만원, 총 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판결은 정부가 항소 기한인 전날까지 항소장을 제출하지 않아 이날 그대로 확정됐다.

재판부는 "망인은 국방부 B-2 벙커에서 근무하던 중 반란군의 무장해제에 대항하다 살해됐다"며 "전사임에도 국가는 계엄군 오인에 의한 총기 사망사고라며 순직으로 처리해 망인의 사망을 왜곡하고 은폐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국방부는 판결 다음 날 브리핑을 통해 "유가족분들이 갖고 계시는 어려움, 아픔에 충분히 공감한다"면서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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