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명 브런치작가

홍진명 브런치작가
홍진명 브런치작가

1592년 4월 13일. 조선의 운명을 바꾼 대재앙은 온유한 봄날에 비롯되었다. 

그 날의 부산은 여느 때와 같았고 또한 여느 때와 달랐다. 왜국과 전쟁이 일어나리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경상도 각지에서 성을 보수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유생까지 군역에 동원했다. 고을마다 상소가 빗발쳤다. 평화가 오래되었습니다. 어찌하여 민심을 어지럽히나이까. 부산 왜관에 상주하던 왜인들이 하나둘씩 본국으로 귀환하더니 어느새 텅 비어버렸다. 의아할 따름이었으나 적으로부터 기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 날 오후 부산진 첨사 정발은 한 무리의 병력을 이끌고 절영도에서 사냥하고 있었다. 정발은 스물다섯 나이에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진족을 토벌함에 공이 많았다. 이에 왜적을 방비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아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 품계와 부산진수군첨절제사 직에 제수되었다. 부산은 경상도로 진입하는 최전방이자 교통의 요지다. 부임한 날로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비에 임했다. 

임지에 떠나기 전 그는 울면서 늙은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충과 효 두 가지를 모두 온전히 해낼 수가 없습니다. 이 아들은 어명을 받고 멀리 떠나가오니, 부디 어머님께서는 스스로 몸을 아끼시고 아들 걱정은 하지 마시옵소서.” 어머니는 울먹인 채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나의 마음만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 어서 가거라. 네가 충신이 됨에 어찌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충심은 곧 효심이었다. 

절영도. 오늘날 부산 영도라 불리는 절영도는 고려 시대부터 국가의 목장이었던 섬이다. 이곳에서 자란 말이 워낙 빨라서 그림자(影)가 끊어져(絶) 보일 정도였기에 ‘절영’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이 푸르른 섬에서 정발이 이끄는 일단의 조선군이 사냥을 하고 있었다. 사냥은 단순히 동물을 포획하는 오락거리가 아니다. 군사들이 진법을 갖추고 활쏘기를 비롯한 무기술을 연마하는 군사 훈련의 장이었다. 유목민이 지닌 가공할 전투력은 일상적인 사냥에서 연마한 것이다. 조선군 역시 훈련 목적으로 오후 동안 사냥에 임하는 중이었다. 

오후 다섯 시. 해가 저물어가는 수평선 너머로 왜인의 선단이 보였다. 이를 발견한 정발은 대마도에서 보낸 세견선(일본에서 교역을 위해 우리나라에 보낸 무역선)으로 생각했다. 선단의 규모가 점점 드러나자 비로소 왜적의 대군세임을 깨달았다. 적 함대를 요격하려 했으나 아군의 전선은 불과 세 척. 인근 해안의 선박에 구멍을 뚫어 모두 침몰시키고 백성들을 성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인근 각지에 왜적이 침공했노라 파발을 급파했다. 부산진의 병력은 불과 1천여 명. 당황한 주민들을 악관을 시켜 퉁소를 불어 진정시켰다. 관군과 백성들은 왜적의 침공에 맞서 성을 반드시 사수하리라 각오를 다졌다. 후방에 토벌군이 모일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이날 부산진을 침공한 일본의 군선은 총 7백여 척으로 조선 침략 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 18,700여 명이었다. 해가 저물었을 때,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정찰병을 이끌고 부산진성 부근을 정찰하였다. 절영도 해안가에 정박해 하루를 보낸 일본군은 공성에 앞서 ‘길을 빌려 달라’는 요구를 부산진성에 전달했다.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다음날 14일 새벽 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고니시가 지휘하는 왜군은 성의 삼면을 포위해 맹렬히 공격했다. 일본군 조총병은 성의 서문 밖 고지에서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격을 가했다, 백성들이 성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틈을 노려 왜군이 성벽으로 진입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굳센 수비에 서문은 쉽게 돌파되지 않았다. 왜군의 칼날 빛은 하늘을 찌르고 함성과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으나 부산진 첨사 정발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군졸들의 항전을 독려했다. 마구 화살을 쏘니 죽은 왜적의 시신이 무더기를 이루었다. 두려움에 놀란 적이 “검은 옷을 입은 장수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할 정도의 무용이었다. 정발이 검은 갑옷을 입고 전투를 지휘했던 까닭이다. 

왜군은 단단하게 지키는 서문 대신 조선 병력 배치에 빈틈이 보이는 북쪽 성벽으로 공격 방향을 틀었다. 적은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성벽을 넘어 성내로 진입하였다. 정발은 이를 저지하고자 분전했으나 이윽고 화살이 바닥나고 말았다. 어느 비장이 정발을 잡아당기며 달아나길 청했다. 정발은 웃으며 말했다. 

“남아는 오직 한 번 죽을 따름이다. 감히 다시는 도망이라는 말을 꺼내는 자가 있다면 즉시 목을 베겠다. 나는 마땅히 이 성의 귀신이 되겠으니,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라” 사졸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조선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발은 왜적이 쏜 총탄에 장렬히 쓰러졌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부산진성은 전투 개시 4시간여 만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조선의 재앙 임진왜란은 부산진 전투를 시작으로 장장 7년간 이어졌다. 천인(賤人)에서 천하인(天下人)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벌하리란 망상을 품었고 동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주전장이 된 조선은 전국토가 잿더미로 변해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당했다. 개전 초 조선은 무기력한 패배를 거듭하며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빼앗겼다. 우리 한국인에게 임진왜란은 무능한 조선군과 옹졸한 임금 선조, 위대한 영웅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이름 없는 의병들이 나라를 지킨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간의 인식이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나 내막을 살펴보면 보다 감추어진 진실이 있다. 

조선 육군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개전 초부터 발생한 총체적인 붕괴는 오랜 평화로 체계가 무너져 있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조선군은 실전 경험을 쌓으며 적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단점을 개선했다. 이러한 노력이 수십 년 후 발생한 정묘·병자호란의 패배로 빛바랜 감은 있으나, 조선은 그들의 재앙으로부터 새로운 전훈을 쌓고 배웠다.

이 글은 임진왜란 시기 지상전에 관한 이야기다. 당대 조선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선군의 노고, 임진왜란 당시 벌어진 전투들을 사실만을 추려 밝혀보고자 한다. 양질의 정보를 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나 무엇보다 이야기로써 독자 여러분이 읽는 즐거움을 느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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