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오늘은 빈계산 수통골에 왔다. 엊그제 발가락 치료를 받고 나서 경사진 곳은 피하라 해서 계곡을 따라 평평한 곳만을 골라 걸었다. 아직 계곡은 꽁꽁 얼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음 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사계절 쉬지 않고 흘렀으니 이 계절만을 좀 쉬어도 좋으련만 물을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이 혹한의 계절에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했다.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기 때문일까? 천성이 그래서일까? 참으로 부지런한 성품이다.

물도 운동과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몸을 좌우로, 상하로 흔들며 천자문을 읽는 것 같다. 몸을 쓰고 머리를 쓰니 치매와도 거리를 두고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 5천 보 걷는 것을 목표로 하는 내 이웃의 팔십 후반 어르신을 닮은 듯하다.

가끔 강둑을 걸을 때면 ‘저 강물도 쉼 없이 흐르는구나.’고 생각해보곤 했다. 얕은 물은 흐르는 것이 보이지만 깊은 물 속의 물은 흐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흐른다. 깊은 물은 잘 여문 벼 이삭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 이삭처럼 늘 겸손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늘 낮은 곳을 찾는다. 자신의 힘으로 솟구치는 걸 자제한다.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군자의 성품이다.

한여름의 물은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장마철 물의 폭력성은 경찰이나 소방관도 못 말린다. 산도 부수고, 바위도 깬다. 나무를 뽑아내고 사람의 생명도 앗아갈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다.

강물은 ‘인간사’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찌 강물이라고 애환이 없으랴. 넓고 평탄한 길을 지날 때도 있고, 폭이 좁은 곳을 지날 때도 있다. 폭이 좁으면서 경사가 있으면 물살이 거세져 리프팅 하는 사람들에게 스릴과 감동을 준다. 물은 언제 보아도 유연하다. 모양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네모진 모양이 됐다가 둥근 원 모양을 하기도 한다. 어떤 그릇에 담겨도 투정하지 않고 순응한다.

강물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빨리 흘러갈 때도 있는가 하면 갈대들이 밀집해 자라는 좁은 틈을 비집고 서서히 흐르며 가쁜 숨을 내쉴 때도 있다. 강물은 제 갈 길을 포기해 버리거나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삶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봄이 되면 포근한 햇살을 품고 흐르고, 한여름은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흐른다. 가을에는 단풍잎 속에서도 흐르고, 한겨울은 얼음 속에서도 흐른다. 어떤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제가 가야 할 곳을 향해 포기하지 않은 채 전진만 하는 강물에 경의를 표한다.

물의 겸손, 부지런함은 나를 비롯한 인간 구성원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큰 덕목이다. 쉽게 포기하고 절망하는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는 강물이 바다에 닿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자기의 꿈의 성취를 위해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경고이겠다. 인간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주위에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냥 연장자인 어른이 아니라 언행에 모범을 보이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런 모범을 보이는 어른이 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의 소망은 물처럼 단순하게 사는 일, 평범하게 사는 일, 자연스럽게 사는 일, 베풀며 사는 일, 감사하며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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