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명 브런치작가

홍진명 브런치작가
홍진명 브런치작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백여 년 전국시대를 거치며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다. 열도 전역이 내전으로 격화된 전국시대는 무력에 의한 자력구제로 생존을 도모했다. 고위 무사부터 일개 병졸까지 지닌 우수한 전투력으로 보여준 강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시대 일본의 군제와 군대를 파악하면서 왜란 당시 침략군의 전력을 파악해볼까 한다.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성립했다. 막부는 쇼군이 실질적 통치자로서 군림하는 무가 정권이다.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남아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일본만의 독특한 이원적 정치 구조는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유럽의 입헌군주제와도 성격이 달랐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수립된 무로마치 막부는 혼란스러운 전국을 통합하고자 각지에 ‘슈고(守護)’를 파견했다. 슈고는 초기 각 지방의 조세와 치안을 담당하는 관직에 불과했다. 슈고의 권한은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이르러 크게 확대되었다. 슈고는 점차 영지의 무사단과 능력 있는 이들을 본인의 가신단으로 포섭하며 영지 내 권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를 지방의 큰 이름을 지닌 자라는 뜻의 ‘다이묘(大名)’라 지칭하며, 이들은 자연스럽게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의 권력은 막부로부터 위임받은 것이었지만 지방 호족 행세엔 부족함이 없었다.

유력한 슈고 다이묘의 반역을 막고자 막부는 슈고 다이묘를 교토에 거주케 하며 감시하였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시기에 쇼군의 후계자 계승을 둘러싸고 격렬한 내분이 발생한다. 1467년 발발한 ‘오닌(應仁)의 난’이다. 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막부 지배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 슈고 다이묘를 위시한 각지의 실력자들은 점차 지방의 독립 군벌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슈고 다이묘 또한 그들의 유력 가신에게 하극상을 당해 지위를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본 사회는 서서히 배신과 암투, 뛰어난 실력을 으뜸으로 숭앙하는 풍조가 자리잡았다. 해당 지역 영주가 되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적 지배 세력이 된 자들을 ‘전국 다이묘(戦国大名, 센고쿠 다이묘)’라 불렀다. 전국 다이묘가 일본 통일을 놓고 다툰 백 년의 시기가 센고쿠, 전국시대다. 따라서 오닌의 난은 흔히 전국시대의 시작이 된 사건이라 일컫는다.

전국 다이묘는 영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분국법(分國法)’이라는 가문 고유의 법령을 제정했으며 농업 생산력 촉진 및 상공업 장려에 힘썼다. 주변 다이묘와의 경쟁에서 앞서고자 함이었다. 영지에서 거둔 각종 세수는 군역과 군비 지출에 사용되었다. 병력 동원은 주로 다이묘 휘하 가신에게 하사한 봉토의 넓이와 소출에 따라 차출 가능한 인원수를 결정했다. 땅이 넓고 수입이 많다면 많은 병력을, 그렇지 않으면 적은 병력이라도 동원해야 했다. 즉 병사들은 다이묘와 가신들의 개인 자산인 셈이었다. 전국 다이묘는 이러한 방법으로 사병을 양성해 경쟁 세력을 병탄하고자 골몰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 일본군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투를 치렀는가?

헤이안~가마쿠라 시대 전투의 특징은 고위 무사 개인의 기마궁술을 위시한 일대일 기마전이다. 일종의 일기토라 볼 수 있는데, 전투에 임하기 전 상대에게 가문 내력, 이름, 신분 등 인적사항을 밝히는 ‘나노리(名乗り)’ 후 일대일로 대결했다. 무사들이 주고받는 일대일 대결은 그 누구의 방해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이들의 대결이 결판난 후 쌍방의 군대가 난전에 돌입하는 것을 법도로 여겼다. 이러한 전투 방식은 가마쿠라 시기 일본을 침공한 몽골군에게 크게 고전한 원인이 된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생산력과 동원력이 향상하며 전장의 범위 또한 거대해졌다. 일신의 무용에 의존한 개인전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방진을 편성해 합을 맞춘 보병 중심의 집단전이 보편화 되었다. 보병의 구성원인 일반 병졸들을 가리켜 ‘아시가루(足輕)’라 한다. 아시가루란 ‘발이 가볍다’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가벼운 무장을 한 병사다. 대체로 신분이 낮은 무사나 농민이 주를 이루었다. 아시가루는 고위 무사와 달리 무기를 쓰는 실력이 부족했다. 활과 검은 능숙해지는 데까지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반면 창은 단순한 찌르기만 할 줄 알아도 말단 병사의 몫은 충분했다. 상대적으로 배우기 쉬운 창이 널리 보급되면서 전국시대 전장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일본에서 쓰인 창의 명칭이 야리(槍)’다. 아시가루들이 애용한 창은 ‘나가에(長柄)’라는 장창으로 3~5.5m의 길이를 지녔다. 창의 장점 중 하나는 상대보다 먼 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한 것이다. 일반 창보다 더욱 먼 거리에서 공격 가능한 장창은 특히 기병 방어에 효과적이었다. 창은 본디 찌르는 용도로 만들어진 무기다. 그러나 아시가루의 창술은 조금 독특했다. 상대의 머리를 때리거나, 휘두르거나, 다리를 거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나가에를 머리에 내려치는 것만으로 위협적인 부상을 유발할 수 있었다. 다리에 걸린 적이 쓰러지거나 도주하면 비로소 창을 찔렀다.

창보다 더욱 쉽게 배울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총이다. 일본에 총이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1543년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섬에 표류하면서다. 포르투갈 상인에게 입수한 총을 복제하는 데 성공하며 일본 전역에 총이 퍼지게 되었다. 총은 우리나라에선 나는 새도 쏘아 맞힌다는 의미로 조총(鳥銃), 일본에서는 철포(鉄砲, 텟포)라 불렀다. 본문에선 편의상 ‘총’으로 통일하겠다.

일본에 도입된 총은 ‘화승총(matchlock)’으로 심지(화승)에 불을 붙여 총의 화약 접시에 넣고 점화를 일으켜 격발하는 방식이다. 당시 총은 총구 안에 탄과 화약을 꽂을대로 쑤셔 넣어 장전했다. 이 방식을 전방 장전식(줄여서 전장식)이라 한다. 삽탄한 탄알집을 총기에 결합해 장전하는 현대 소총과 달리 전장식 총은 총구에 일일이 장전하는 번거로움으로 장전 속도가 느렸다. 화승과 화약은 습기에 취약해 우천 시엔 사용하지 못했다. 이러한 단점을 상쇄할 만큼 총은 배우기 쉬웠다. 장전하고 방아쇠만 당기는 법만 알면 기초적인 조작법은 끝이다. 표적을 조준하여 명중시킨다면 한 명의 포수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은 며칠이면 충분하다. 유효사거리 내에선 적에게 확실한 치명상 내지는 죽음을 선사한다는 점도 총의 무서움이었다. 어린이나 노인의 손에 총을 주면 건장한 장정도 능히 쓰러뜨릴 수 있다. 그리하여 총은 원산지인 유럽에서부터 위력을 인정받았다. 지구 반대편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총은 급속도로 전파되어 전장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물론 배우기 쉬운 것과 총을 능숙하게 다루며 정밀하게 사격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창과 총을 주무기로 활용한 전국시대 일본군의 집단전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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